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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TV 예능 프로에서 과거 치적 미화했다가 '논란' 자초  심재철 "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유죄판결 핵심 증인 역할" 
  • 이영란 기자
  • 승인 2019.05.07 14:52
  • 입력 2019.05.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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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일보=이영란 기자]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진술서'를 둘러싼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간 진실공방이 유 이사장의 자필 진술서 전문 공개로 일단은 심 의원이 승기를 잡았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7일 유 이사장이 다시 해명에 나서 논란을 이어가는 모양새여서 주목된다. 

심재철 의원은 전날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던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기록 안에 포함된 유 이사장과 자신의 '진술서 전문' 사본을 공개했다.  특히 양자 간 공방의 핵심이었던  진술서 작성 시점과 관련해서도 '1980년 6월 12일'로 적시된 유 이사장의 자필 진술서 사진을 페이스북에 공개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심 의원은 이 날 페이스북을 통해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사건 고발인 자격으로 서류를 작성할 때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 입증증거였던 유시민의 진술서를 구할 수 있었다"면서 "그때 비로소 유시민이 검찰측 참고인이었다는 사실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증인으로 판결문에 판시되었음을 처음 알았다"고 술회했다. 

이어 "(심의원 공소사실의 핵심 입증 증거로 활용된) 유시민의 진술서는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자적 시각으로 학우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면서 "1980년 6월 11일의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미체포된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되었고 그 중 15명은 심재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다"고 밝혔다. 

특히 "유시민의 진술로 故김병곤 선배는 (심재철은 물론) 신군부가 의도한 민청협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시위 교사의 정황증거가 되어 이해찬 씨에 대한 검찰측 핵심 증거로 판결문에도 인용됐다"면서 "(그 결과) 유시민은 당시 운동권 핵심인물이었지만 진술서 제출 이후인 1980.8.20. 아무런 처벌 없이 불기소로 석방됐다"고 밝혔다. 

이어 "유시민이 1980년 당시 고문을 견뎌가며 학우들을 지켰는지, 상세한 검찰측 참고인 진술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방송을 통해 문장력을 뽐낼 만큼 진술서가 국민 앞에 당당한 내용인지는 이번에 공개되는 진술서 전문을 통해 밝혀질 것"이라면서 "본인(유시민)의 저서에서 밝힌 대로 피조사자에게 수사국 사무실 청소를 시키는 호의를 베푼 것은 어지간한 협조관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유 이사장이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 1985년 '항소이유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했다. 

심 의원은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민간인에게 폭력을 가한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주범으로 유시민이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나서 썼던 글"이라며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80년 당시에 영문도 모른 채 공소취하로 석방되어 48시간만에 군대 강제징집 되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8월 20일 불기소로 석방되어(80.8.20. 경향신문) 2주 후인 9월 4일 군에 입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의 행적을 거짓으로 미화하는데 거리낌 없는 유시민은 본 의원의 진술서를 공개하라고 했는데 본 의원은 당시 6월 30일 자수했고, 2심 재판 후 피고인 24명 중 7번째로 형집행정지로 석방 됐고 이어 군에 강제징집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기소로 석방된) 유시민은 그의 진술서에서 나를 78번 언급하며 내 공소사실의 90%를 입증해 판결문에 증거의 요지로 판시되었지만  본 의원은 수사관의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유시민의 이름을 ‘회의에 참석했다’고 단 한번 거명했다"면서 "누구 진술이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동료들의 목을 조였는지 국민들께서 진술서를 읽어보고 판단하시리라 믿는다"고 글을 맺었다. 

이와 관련 유 이사장은 이날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문제의 '1980년 6월 12일자 진술서' 내용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런 배후 없이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애썼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학생을 사주해서 시위를 일으키고 그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게 당시 (당국의) 조작 방향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유 이사장은 “(진술서 중) 내가 1980년 3월 심재철 의원을 처음 만난 대목부터 완전히 창작이었다”며 “합수부 수사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도록 성의있게 진술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위를 할 때마다 신문에 났던 심 의원이 나 때문에 기소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오히려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이었던 이홍동, 그리고 나는 총학생회 간부 3역으로 진술서에 자주 나올수록 좋은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당시 진술에서 현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관련해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 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이라고 언급한 데 대해선 “이해찬 선배가 몇천명 보는 데서 내 멱살을 잡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까지 진술하지 않기는 어려웠다”며 “다만 ‘그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들었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이어  “진술서의 내용과 방식을 볼 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창작인지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걸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우리의 행위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법적으로 끝나길 바랐다”고 강조했다. 

둘 간의 공방은  유 이사장이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뜻밖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 곳이 합수부"라며 "(진술서를 쓸 때) 누구를 붙잡는 데 필요한 정보와 우리 학생회가 아닌 다른 비밀 조직은 노출 안 시켰다"고 과거 치적을 내세우면서 촉발됐다. 

심 의원이 이를 반박하자 지난 1일 개인 유튜브 방송 '1980년 서울의 봄 진술서를 말할레오'에서는 "제가 그때 서류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심 의원이 공개한 건 (유 이사장의) 자필 진술서다. 제가 추측하기엔 7월에서 한 7월 중순 이후에 쓴 거로 보인다"면서 "심 의원이 잡혀 온 6월 30일 이후 합수부에 재차 불려가 심 의원이 진술한 내용에 맞춰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급기야 페이스북에 당시 작성된 유 이사장의 자필진술서를 공개한 심 의원이 "90쪽 자필 진술서가 다른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었고, 이 중 3명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24인 피의자가 됐다"면서 "유 이사장의 진술서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2심 판결문에 증거로 적시됐다"고 반격에 나서자 논란이 커졌다.  
 
   
  이에 유 이사장이 지난 1일 개인방송을 통해 "진술서에 감출 것은 감췄고, 부인할 것은 다 부인했다"면서 "계엄사 합동수사부에서 쓴 진술서에 신계륜(당시 고려대 학생회장), 이해찬(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 등 (당국이) 다 아는 것만 썼다. 김대중 총재의 조종을 받아 시위했다는 진술을 계속 요구받았지만 알지 못한다고 버텼다"고 주장하자 심 의원이 이를 재반박하면서 공방전을 이어간 것이다.  

심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유 이사장은 진술서에서 총학생회장단이나 학생지도부 외에 복학생 등 여타 관련자와의 사적 대화까지 상세하게 진술해 수사 초기 신군부의 눈과 귀를 밝혀준 셈이 됐다"면서 "1980년 6월 11일자 유시민 진술서에 언급된 77명 중 미체포자 18명이 6월 17일 지명수배됐고, 이 중 체포된 복학생 중 일부는 이해찬에 대한 공소사실의 중요 증거가 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은 '자신의 진술서는 심재철이 체포된 후에 7월 심재철 것을 가져와 강요해 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다"라며 "내 유죄 핵심증거로 재판부에 제출된 유시민의 합수부 진술서는 내가 체포(1980년 6월 30일)되기 전인 6월 11일과 12일 작성됐다"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유 이사장이 다시 유튜브 방송에서 "심 의원이 본인의 진술서를 공개해봤으면 한다"면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당시 군사법정에 제출된 심 의원의 자필 진술서와 진술조서, 법정 발언을 날짜순으로 다 공개해보면 제 진술서에 나온 내용이 누구 진술서에 제일 먼저 나왔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심 의원이 문제의 자필 진술서 사본을 공개하고 나서자 진실 공방에서 한풀 밀리는 모양새였다.    


[전문] 유시민 1980년 6월 12일 합수부 진술서

진술서(1회)

본적

주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유시민( 生)

1. 저는 일전에 미처 진술하지 못한 사항이나 잘못된 사항, 불명확한 사항을 상세히, 잘못을 수정하고 명확하게 진술코저 합니다.

1. 저는 3월 10일 경 오후 1시에 7동 102호 강의실에서 개최된 경제학과총회에서 경제학과 과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총대의원회의 대의원 자격을 취득하였읍니다.

1. 1980.3.15.경 오후 2시쯤 사회대학생 회실에서 사회대대의원회의를 열고 있었는데 안건은 아마 신입생환영체육대회 개최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때 현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이 찾아왔읍니다. 총학생 회칙상 총학생회장은 각과대표 및 계열대표 124人으로 구성되는 총대의원회에서 간접선거로 뽑게 되어있었고 입후보 요건으로 최소한 10人 이상의 대의원 추천서를 입후보 마감 시간 전까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토록 되어있었으므로 심재철이 사회대 대의원들의 추천을 받으러 사회대학생회실로 찾아온 것이었으며 그냥 추천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몇마디 질의응답을 해보았는데 그때 심재철은 써클활동의 자유, 학내언론자유, 집회의 자유 등 "잃어버린 권리의 회복을 모토로 삼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것이 저와 심재철의 첫 대면이었읍니다. 그후 3월 28일 이전까지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금전수수, 음식, 술대접 등은 전혀 없었으며 선거유세할때만 청중속에 섞여 심재철이 연설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심재철은 3월 24일과 27일 양일간 오후 1시 아크로폴리스에서 연설하였는데 그의 모토는 교내의 언론, 출판, 집회 등의 자유회복과 유신잔재청산, 대학문화혁신의 3가지 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1. 3월 18일경 사회대 대의원회의를 하는 도중 사회학과 대의원인 유현오, 정치학과 대의원 김종명, 외교학과 대의원 전상훈 등이 "사회대는 대의원 수도 11명으로 많고하니 총대의원회의장을 우리 사회대에서 배출해보자. 사회대에서는 항상 경제학과가 제일 규모도 크고 리이더격이니 유시민을 후보로 내어보자"고 주장하였고 총학생회칙상으로 볼 때 총대의원회의는 그리 자주 열리는 것도 아니고 학기초와 학기말 그리고 선거할 때 열리므로 그리 시간을 많이 뺏길 것 같지도 않고 대학생활의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저도 승낙하였읍니다.

1. ①3월 28일 13:00부터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열린 제1회 총대의원회의에서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기 직전에 총대의원회의장 선거가 있었읍니다. 총대의원회의장은 총학생회장과는 달리 실무나 집행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총학생회장이 너무 독단적이거나 부정이 있을 때 총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견제하고 비판하며 학기초와 말에 예산 및 결산 심의·승인을 위하여 총대의원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그 주임무이므로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유세나 합동연설 없이 그 자리에서 출마하여 약 20분만에 선출되었읍니다. 저는 그때 공대 조선공학과 대의원인 이원태군과 경합한 끝에 80:31로 당선이 확정되었고 약 5분간의 소견발표에서 저는 "학생회는 순수한 학생자치기구이며 우리는 단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모든 외부 세력으로부터 학원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수호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바 있읍니다.

② 같은 날 동의장선출이 끝나고 나서 총학생회장선거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공대의 양 지청후보가 사퇴하였으므로 총인원 124명 중 114명이 투표한 이 선거에서 심재철(사대 영어과4)이 김기달(치대본과4) 후보를 92:22로 누르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읍니다.

③이 날 선거가 끝난 후 인문대 대의원 회의에서 채택된 병역집체훈련 거부 결의문이 총대의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제출되었으나 저는 그것을 다음번 총대의원회의의 안건으로 처리하겠다고 하여 그날 토론에 붙이지는 않았읍니다.

인문대결의문의 내용은 「병영집체훈련제도는 구체제의 산물이며 군사훈련은 교련교육만으로 충분하므로 학원병영화의 철폐를 위하여 이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것이었다고 저는 알고 있읍니다.

1. 4월 2일경 오후 2시쯤 대학본부 학생처장실에서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님을 만났을 때 총학생회칙 중 제9조 6호 "학칙개정 발의 및 사전동의권" 제9조12호 "학교관계당국자의 출석요구" 제12조 9호 중 "학교운영의 중요사항" 등 3 구절이 명백히 교권과 학사행정권을 침해한다는 이야기를 이수성 교수가 하였읍니다. 그래서 저는 차기 총대의원회의에서 이 대목을 개정할테니 학처장회의에서 총학생회칙을 승인하여 달라고 하자 이수성 교수님은 "개정후면은 승인이 가능하다."고 하셨읍니다.

1. 4월 9일 19:00~22:00 신촌로타리부근 중국집인 "청원"에서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이화여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하였는데 이 회의는 서강대 총학생회에서 주최 및 주도하였고 서강대 총학생회장 박성혁이 사회를 보았읍니다. 이 회의에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제가 참석하였읍니다. 회의 내용은 성균관대학교의 병영집체훈련거부 상황보고와 협조책 강구, 경희대, 세종대 등 사립대학의 재단부조리문제로 인한 학원사태에 대한 이야기 등 2가지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성균관대학교 총 학생회장이 타학교가 동조해 줄 것을 강력히 총구하는 발언을 하고 "이 문제는 성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대학의 공통과제이므로 성대가 십자가를 진 셈이니 도와달라"고 하여 성대의 병집거부결의문에 서울대, 연대, 서강대의 총학생회장들이 공동으로 서명하였읍니다.

1. 4월 10일 오후 3시 28동 103호 대형강의실에서 개최되어 오후 8시 30분 경에 폐회한 제2차 임시총대의원회의에서

①4월2일 학생처장 이수성교수가 교권 침해로 규정한 제9조6호 "회칙개정발의 및 사전동의권"을 "학생권익에 관한 학칙개정건의권"으로 수정하고 제9조 12호 "학교관계당국자의 출석요구"는 삭제하였고 제12조9호 중 "학교운영의 중요사항"을 "학생권익에 관한 중요사항으로 수정하였으며 이때 참석대의원은 79명이었읍니다.

②동 회의에서 총학생회 각 부장 즉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과4), 사회부장 허남정(인문대 철학과 3), 총무부장 이용화(자연대 계통과3), 체육부장 박명기(사대 체육과3),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사회대 정치학과4)을 인준하였으며 4월혁명기념제 및 4월 가예산을 심의 승인하였읍니다.

③3월28일 제1차 총대의원회의 당시 인문대에서 정식 안건으로 상정한 병영집체훈련거부 결의안을 62명의 대의원이 있는 가운데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총대의원회의장인 제가 결의문 작성 및 인쇄를 위임받았읍니다.

④저는 같은날 총대의원 회의가 끝난 후 총대의원회 사무국에서 약 10시까지 결의문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이것을 4월 11일 10:00경 사범대학 지학과 대의원인 황원기에게 8절지 시험지에 깨끗이 쓰게한 후 「4월 혁명 기념제」포스타 및 프로그램 인쇄를 위해 마침 학교에 와있던 대한인쇄소 업자에게 부탁하여 2000매를 제작하였으며 대의원들을 통하여 주로 관학캠퍼스에 있는 1학년들에게 배포하였읍니다. 이때 비용은 3만원이었으며 1학기 총대의원회 예산 70만원 중 일부를 총무부장 이용화군

으로부터 지출받아 충당하였읍니다. 대한인쇄소의 전화번호나 출입업자 이름은 저로서는 알지 못하며 주로 운영위원회와 집행부에 거래관계를 가지고 있었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가. 김상진 추도식, 장례식)

1. 4월11일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는데 ①관악캠퍼스에서는 10:00~12:00 사이 총학생회 발족기념식·복교복직 환영식 및 "고 김상진 열사"추도식을 겸한 행사가 있었는데 저는 그때 사회를 맡아 보았읍니다. 그런데 식의 진행이 늦어지자 수원농대캠퍼스에서 12:30경부터 열릴 예정이던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장 심재철 및 부회장 김학진은 식이 끝나기 15분 전인 11:55경 수원으로 먼저 출발하였고 저는 끝까지 사회를 보았는데 12:10경 식이 끝나고 나서 제가 학생들에게 "수원으로 갈 사람은 지금 본부앞에 있는 스쿨버스에 탑승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때 웬 복학생 한 명이 와서 모든 학생이 다 수원으로 가기에는 버스 15대로는 부족하니 남은 학생들끼리 시국성토대회를 하게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총학생회장도 없고 원례 계획에도 없는 순서이니 나로서는 어쩔수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마이크·스피커 등을 철거시켰읍니다. 그런데 그 복학생이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를 비난했기 때문에 저도 "뭐 잘못한게 있느냐?"면서 약 5분간 다투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복학생이 바로 학기초부터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사회학과)이었읍니다.

②마이크나 스피커 설치는 학생회간부들이 본부 4층 엠프실에 부탁하면 언제든지 설치해줍니다. 그렇게 해주라는 학생처장의 지시가 있은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③저는 14:00경 스쿨버스로 수원농대로 가서 18:00까지 "故 김상진 열사 장례식"과 발인을 보고나서 수원농대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자기는 제주이므로 일찍 나갈 수 없으니 19:00까지 중국집 "청원"에서 있는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가보라고 하였으므로 18:00경 학교를 나왔읍니다.

④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성신여대 숙명여대 숭전대 등 학교의 총학생 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고 성균관대학교의 병영집체훈련 거부 농성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역시 사립대학 족벌재단문제에 대해 경희대를 위한 모금운동 등을 하자는 제의가 나왔으며 이것은 서울대 총학생회 학생활동위원장이 이홍동(정치과4) 6.17. 지명수배

이 제의한 것입니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은 타대학도 같이 교내시위 농성을 시작하여 병집거부 농성을 하고 있는 성대와 보조를 맡추어달라고 촉구하였으나 다른 대학은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읍니다. 이때 서울대에서는 저와 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참석하였고 심재철은 21:00경에 도착하였으며 사회는 누가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며 모인 것은 4월 9일 폐회시의 약속에 따른 것이었읍니다.

1. 4.12. 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4월 11일의 회의 끝에 한 약속에 따라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숭전대, 동국대, 이대 지명수배 후 합수부 진술

숙대 성신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 숭전대 총학생회장 윤여연 지명수배 후 합수부 진술서 작성

이 사회를 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저는 참석치 않고 서울大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만 참석하였으므로 저는 회의의 상세한 모르지만 사립대학의 족벌재단의 반성을 촉구하는 9개 대학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었으며 그 초안은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나. 및 17. 학생회장단 회의)

1.①4.16. 19:00~22:00 중국집 청원에서 서울大, 서강대, 연대, 성대, 건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회의를 개최하고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회의를 주도하면서 4.14 최규하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정부가 학원사태를 계엄연장의 이유로 든데 대해 그리고 신현확 국무총리가 또 유사한 발언을 하고 정부가 개헌주도를 해야한다는 기자회견을 한데대해 시국에 대한 공동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후 설명서 초안 작성을 서울대에서 일임 받은 후 다음날인 17일 오후 3시에 연세대학교에서 모여 초안을 검토한 후 오후 5시에 발표하기로 하였읍니다. 서울대에서는 심재철과 제가 참석했읍니다.

②회의가 끝난 후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함께 원풍아파트의 그의 누님댁으로 가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심재철이 "비상계엄 해제" "정부주도 개헌 반대", "언론자유 보장" 등의 항목을 생각해내어 제 의견을 물었고 제가 거기에 동조하자 그 중 "정부개헌 반대" 문제는 제가 초안하게 하고 "비상계엄해제" 문제는 심재철이 초안하였으며 "언론자유보장"은 심재철이 쓰다가 저에게 넘긴 것을 제가 마무리 하였읍니다. 다음날 아침 그것을 8절지에 베껴 쓴 저는 연대로 가는길에 14:00시경 교문 앞 복사실에서 20부를 복사하였읍니다.

1. 4월 17일 15:00경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大, 연대 고대, 성대, 서강대, 건대 숭전대, 동국대, 이대, 숙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등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제가 복사해 온 초안을 검토한 후 자구수정을 하여 다시 연대학생회에서 약 30부를 제록스 인쇄하여 기자들 약 10명(동아, 조선, 합동통신, 문화방송 등의 기자)과 학생회장들에게 배포하였고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광호 지명수배

가 성명서를 낭독하였으며 성명서의 제목은 "현시국에 대한 공동성명서"였고 내용은 비상계엄에 대하여 헙법개정에 대하여 언론자유에 대하여 등이었으며 바로 비상계엄해제 정부주도 개헌 반대,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읍니다. 이 성명서는 일반학생에게는 배포하지 않았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나. 기념식 행사 및 시위사실)

1. 4월 19일에는 4·19 20주년 행사가 ①10:00~11:00 우천관계로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열렸으며 약 1000 여명의 학생들과 총장, 부총장, 학처장 약 15분이 참석하셨고 총장 고병익 교수는 기념사에서 「이렇듯 떳떳하게 4·19 행사를 학생들과 함께 개최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였고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는 4·19 당시의 60.4.25 교수단의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읍니다.

이것은 총학생회장 심재철군의 부탁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또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4.19 제20선언이란 유인물을 자신이 작성, 집행부를 시켜 약 300부를 인쇄하여 기념식장의 기자들과 학생들에게 배포한 뒤 자신이 식장에서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은 「한국의 현대사는 4.19 정신과 그것을 죽이려는 자 사이의 투쟁의 기록이며 지금도 반민주와 민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으며 반드시 민주가 승리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읍니다.

②기념식이 끝난 후 약 1000여명의 학생들과 10명의 교수들은(즉 부총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학장 등)은 스쿨버스와 전세버스 28대를 타고 4.19 묘소를 참배하였으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오후 2시30분경 「4.19 제20선언」을 묘지의 탑아래에서 다시 한번 낭독하였읍니다.

1. 4월 23일 22:00시경 봉천동 소재 세운여관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

총학생회 부회장 김학진(조선공학3) 지명수배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교육학3)

자연대 〃 배명규( · 3)

공과대 〃 양점식( 3) 지명수배

약학대 〃 김대중(제약 3)

사회대 〃 유승호(경제 3) 지명수배

등과 제가 같이 모여 병영집체 훈련거부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저는 운영위원이 아니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말에 따라 한쪽 구석에서 하늘색 볼펜으로 "존경하는 학부모님께"라는 제목의 가정통신문을 초안하였읍니다. 제가 이 유인물을 초안하는 동안 운영위원들은 병영집체훈련기간인 5월 4일에서 5월 13일 사이에 학교에서 정상수업을 해주지 않더라도 학생들끼리 3·4 학년의 1학년 반으로 들어가 교양세미나를 한다거나 학술토론대회를 단과대학별로 계획 준비하기로 합의를 보고 공대 학생회장 양점식군의 제의로 학교에 정상수업을 요구하기로 하고 또 약대 학생회장 김대중군의 제의로 학교에 개별입소통지서를 발송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로 하였읍니다. 한편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성균관대학교의 경우 국민들의 여론이 별로 좋지 못하다. 우리도 괜히 이 문제를 꺼낸 것이 아니냐? 우리가 정부에 말려드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읍니다.

저는 이 유인물 초안을 동월 24일 09:00시경 총학생회장의 책상위에 놓아두었고 그것을 운영위원들이 약 2500부를 인쇄하여 단과대학별로 나누어서 1학년들의 가정으로 발송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1. 4.25경 학생처장실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만나 문제가 되고 있던 병영집체훈련 거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적이 있는데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학교에서 개별 입소통지서를 발송하지 말것과 입소기간인 5.4~5.13 열흘동안 1학년에 대해 정상수업을 실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중 개별입소통지서를 학교측에서는 발송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내었고 정상수업 관계는 확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1. 4.28 15:00~18:300 종로 한일관에서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열렸는데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참석하였고 본인은 참석치 않아 참석한 학교나 주도한 사람 등 자세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5월에 들어가면 학원의 이슈를 교내문제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확산시키자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1. 4월 30日 11:00경 저는 수원 농대에서 어용교수 문제로 교내시위가 4월28일부터 일어났고 급기야 30일에는 학교를 점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놀라 수원농대로 출발하였읍니다. 약 13시 30분경 농대에 도착한 저는 오후에는 원인과 상황 등을 파악해보고 나서 19:00시 ~ 5월 1일 03:00시까지 열린 평교수협의회와 학생회의 회담에 같이 참석하여 사태를 파악한 후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려면 어용교수로 지목되고 농교육과 송해균 등 세교수가 물러나거나 학생들이 농성을 끝내야 하는데 어느 한 쪽도 양보할 것 같지가 않았읍니다.

저는 농대학생회장 채정석에게 "농성을 장기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한 후 5월 1일 11:00경 수원농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 ①5월 1일 약 14:00시 조금 지날 무렵 저는 관악캠퍼스에 다시 도착하였는데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약 2000명이 모여앉아 있었읍니다. 저는 도착즉시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은 후 총학생회장실로 올라가 부회장 김학진군으로부터 병영집체 응소여부를 놓고 18시부터 운영위원회가 있다는 말과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학생들이 복학생 약 300명 외에 대부분이 복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를 구경하는 일반 재학생들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사회를 본 사람이 박우섭(자연대 미생물학과) 지명수배, 이해찬 씨와 함께 활동한 민청협 회원

이며 그가 사회, 구호선창, 데모지휘 등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은 14:30시부터 16:00 사이 아크로폴리스와 교문사이의 진입로를 왕복하면서 "계엄해제"등의 구호와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교내시위를 벌였읍니다. 저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나 이날 복학생총회에서의 시국성토와 교내시위가 다음날부터 정치문제를 들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그에 따라 학생회는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읍니다.

②이날 즉 5월 1일 18:00부터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지명수배

사회대 〃 유승호(경제3)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경영3) 지명수배 후 합수부 진술서 작성

법대 〃 이철우(법3)

사범대 〃 진영효(교육3)

공대 〃 양점식(3년)

약대 〃 김대중(3년)

자연대 〃 배명규(3년)

가정대 〃 김경미(의류3)

미대 〃 박종철

총여학생회장 이재인(교육3)

그리고 저 등이 있을 때 18:00시 조금 넘어 연성만(人文大) 지명수배 후 체포. 8.20. 공소취하로 석방

, 심상환 지명수배

(사회학과), 오세중(철학과) 등 복학생 6명 정도가 들어왔고 이때 심재철은 방문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어서 오쇼"하고 인사를 한걸로 보아 복학생과 심재철 사이에 미리 양해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명목상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를 보았으나 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 사람은 연성만(인문대)이었으며 심상환등 다른 복학생들은 다들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채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 우리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론이나 국민들의 인식이 악화되므로 병영집체훈련거부는 깨끗이 철회하고 5월 2일부터는 교내시위를 벌이면서 비상계엄문제를 이슈화하자"는 주장을 하였는데 처음에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 사범대 학생회장 진영효 등이 반대의 뜻을 보였으나 결국 설득당해 복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읍니다.

이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약 22:00경 이것을 먼저 신문에 발표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다른사람들 즉 운영위원이 아닌 저나 복학생들을 옆방인 집행부실로 퇴장시킨 후 운영위원들끼리 약 23:30까지 의논한 후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5월 2일 02:00경 한국일보 등 신문기자들에게 발표하였읍니다. 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여러개의 구호를 단과대학으로 배당하여 주었는데 예를 들어 「비상계엄해제하라」는 사범대, 「노동삼권보장하라」는 경영대, 「정부개헌 중지하라」는 법대 「유신잔당물러가라」는 가정대에... 이런식으로 각 단과대학 별로 구호를 하나씩 나누고 각 과별로 글 내용을 자유롭게 피켓 하나씩을 준비하게 하였읍니다. 이 비용은 모두 학생회비 및 과회비로 충당하였다고 알고 있읍니다.

③ 운영위원회의 이 결정은 4월10일 총대의원회의에서 가결한 병영집체훈련거부결의안과는 상호 배치되는 것이므로 운영위원회는 의장인 저에게 총대의원회의의 소집을 요구하였읍니다. 총학생회칙상 운영위원회가 소집을 요구하면 총대의원회 의장은 반드시 총대의원회의를 소집하여서 운영위원회에서 제출한 안건을 토의하여야 합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라. 학생총회 및 시위 사실)

그래서 5월2일 12:00시부터는 민주화대총회가, 11:30부터는 총대의원회의가 각각 아크로폴리스 광장 및 학생회관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1.① 5월2일 10:00부터는 각과별 반별로 과총회, 반총회를 열어 병영집체훈련응소 설득작업을 대의원 학생회간부들이 벌이고 12:00 인문대로부터 입장하기시작하여 하얀 가운을 입은 600여명의 남녀 의대생들이 마지막으로 「계엄해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입장하고 아크로폴리스 약 1300평의 광장은 12,000명의 학생들로 꽉 차버리고 말았읍니다. 이때 같은 시간 저는 총대의원회의를 열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사회도 보면서 시국선언문도 낭독하였으며 구호를 선창하고 교내 순환도로를 일주하는 민주화 대행진을 총지휘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때 낭독한 시국선언문은 총학생회장 자신이 작성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5월6일자 대학신문에 전문이 게재되었으며 내용은 역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서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어야 하며 언론검열제도등의 모든 비민주적인 요소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② 저는 11:30부터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운영위원회의 독선적인 응소결정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냐를 의제로 운영위원회 요구로 개최된 임시총대의원회의를 하다가 밖이 시끄러워 26동 대형강의실로 12:30경 옮겨 14:30까지 회의를 한 결과 96명의 참석자중 79명의 찬성으로 총대의원회의가 4월10일에 결의한 바 있는 병집거부를 철회하고 운영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하였읍니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비판하면서도 총대의원회가 그 결정사항을 부인하면 학생회가 두 쪽이 난다는 생각 때문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③ 이날 14:00시~17::00시 사이 3시간에 걸쳐 교내 순환도로를 12,000명이 일주한 민주화대행진은 그 코스가 아크로폴리스→ 진입로 → 교문앞 → 기숙사앞 → 교련장 → 4.19탑 → 아크로폴리스의 순서였고 연극반의 징과 꽹가리가 힘차게 울리고 각 단대별로 하나씩 15개의 플래카드와 각 과마다 준비한 100여개의 피켓을 앞세우고 그 앞 뒤 행렬의 길이는 거의 1.5km 정도에 달하였고 각단과대학 별로 4.19탑에 묵념을 드린후 아크로폴리스로 집결하였읍니다.

④ 이때까지 지휘는 모두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맡았으며 대행진이 끝났을 떄 인원은 6000명 정도였는데 19:00시경 이 6000명의 학생이 다시 교문앞으로 집결하였고 이때부터 약 21:00시까지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퇴진」 「전두환 되진」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제로한 자유성토가 있은 후 약 21:00경 학생활동위원회(위원장 : 이홍동, 정치4)에서 준비해온 2개의 꼭두각시에 신현확, 전두환의 이름을 써서 교문에 매단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가졌읍니다.

이 화형식 준비는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군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저는 이 때 사회를 보았읍니다.

⑤ 철야농성을 하기 위하여 다시 21:00경 아크로폴리스광장에 모였을 때 인원은 약 3000명 정도 되었으며 식당에서 단대별로 차례차례 저녁식사를 한 후 역시 단과대학별로 도서관 6개방과 학생회관을 이용하여 철야농성을 시작하였고 농성시 토론의 주제나 구호의 내용은 낮시위때와 동일한 것이었읍니다.

⑥ 이날 17:00경 학생 6000여명이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그리고 저와 그 외 2명 정도의 학생회간부들이 앞에 모여있는데 이해찬 심상환 등 3~4명의 복학생들이 콜라 5~6잔을 사왔고 그중 이해찬이 저에게 콜라를 주었으므로 제가 4월11일 일도 있고 해서 화해하느라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는데 그때서야 저는 바로 그가 이해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제가 "일전에 다툰 일은 미안합니다"고 사과하자 이해찬은 일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수고가 많다고 격려해주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1.의 마. 서울대 시위사실)

1. ① 5월3일 오전에는 역시 전날과 동일한 구호를 외치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앞에서 시위, 연좌하였으며 다음날 문무대에 입소할 1학년생들을 입소준비할 시간을 주기위해 약 15:00경에 박수를 치면서 교문밖으로 내보내 1학년 약 1천여명은 그 때 귀가하였읍니다.

② 이날 13:00경 아크로폴리스에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운집해 있을 때부터 5월2일 오후2시경 4동 대형강의실에서 총회를 열고 학부 학생들의 교내 시위 및 철야토론 대회에 같은 과의 학부학생들에 섞여 약 500명의 대학원생이 참가하여 쭉 같이 행동하였읍니다.

③ 15:00시경 1학년을 내보낸후 약 3000여명이 교문앞에 연좌하면서 비상계엄해제. 과도일정단축. 언론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국성토대회를 벌였으며 이 때 사범대학 학생회장이 사회를 보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부개헌 중지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하였으며 18:30경 교문앞 성토대회를 마치고 다시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동일한 주제로 철야농성을 벌였는데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각 단대별 농성장에서 자기 단과대학소속 학생들을 지휘하였고 이때 농성인원은 약 2000여명 되었으며 21:30분경 고병익 총장님이 농성장을 둘러보겠다는 전화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로부터 총학생회장실로 걸려왔으므로 제가 안내하고 총장 고병익교수, 부총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각단과대학 학장 등 약 십여명이 농성장인 도서관과 학생회관을 둘러보았으며 이 때 총장님은 그냥 농성장에 들어가셨고 그러면 학생들은 박수를 쳤으며 총장님은 답례로 손을 잠깐 들어보이는 정도였으므로 약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읍니다.

④ 이날 밤 총 연극회 학생 약 10여명은 23:00시경 도서관과 학생회관에서 농성학생들이 보는 앞에 궁정동사건을 풍자한 연극을 하였읍니다만 저는 그 학생들의 이름은 알 수 없고 각 써클은 문예부 소관이므로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3)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모 두 문무대 입소 환송식)

1. ① 5월4일 오전10:00시부터 교문앞에서는 일학년 병영집체훈련 환송식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1학년생 약 2500명과 일반학생 약 3000며명등 5000~6000여명이 운집하였읍니다. 이때 사회를 본 것은 인문대 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 3)이었고 그는 환송식이 시작되기 직전 "정의가"등의 노래를 선창하였고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하기도 하였읍니다. 여기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환송사"에서 "보다 큰 민주화투쟁을 위하여 입소하는 일학년에게 감사한다"고 했으며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는 이 때 일학년들에게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은 학생, 교수 모두가 꼭 같은 것이다. 대학의 파국을 막아준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말하였읍니다.

② 13:00경 환송식이 끝나고 1학년들이 탑승한 버스가 교문을 나설 때 양쪽에 늘어선 300여명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불러주었으며 버스에 탄 1학년생들은 "정의가"등의 노래와 "비상계엄해제"등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떠났읍니다.

③ 1학년들을 보내고 약 3000명의 학생들은 다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하여 농성해제식을 가진 후 15:00경 농성을 해제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 농성해제식에서도 저는 목이 쉬어서 못하고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이 사회를 보았으며 애국가를 부른 후 해산했는데 같은 시간에 교문앞에 있던 200여명의 전투경찰도 철수하였읍니다.

④ 같은 날 18:30경 총학생회장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부회장 김학진 문예부장 권혁철과 제가 같이 봉천동의 한식집(한식집이름 미상)에서 생선찌개와 곱창을 시켜 저녁식사를 하고 소주 2병 정도를 마셨는데 저는 이때 워낙 피곤하였으므로 술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동안 모두들 수고했다"면서 격려해주고 식사대 약 10,000원도 자기가 지불하였는데 그 돈의 출처는 알지 못합니다.

1. 5월2일~4일간의 농성기간중 특히 중요한 것은 5월1일밤 갑자기 병영집체훈련 응소결정을 내린 학생회가 학생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고 궁지에 몰려있던 5월2일 12:)0시부터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일만이천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민주화대총회중 김부겸(복학생, 정치학과4)이 아주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총학생회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함으로써 일만이천 학생을 멋지게 설득하고 위기에 처한 총학생회를 구출해 주었기 때문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많은 복학생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이 학생회를 살려줬다"라고 심재철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읍니다.

위 기간 중 농성비용으로 사용된 자금은 모두 총학생회 예산에서 지출된 것이며 특히 식사비는 제가 알기로 약 250만원 정도나 지출되었다는 이야기를 5월4일 농성이 끝난 후인 16:00경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 모두 학생총회)

1. 5월6일 오후2시 4동대형강의실에서 저는 임시총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총원 132명중 약 100명이 참석하였고 여기에서는 우선 농성비용등으로 학생회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으므로 1000원씩의 추가회비를 1인당 징수하여 민주화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 가결되었고 서울대 사무처 학생과장이 합수부에서 경비지출 관계로 조사받고 진술서 씀

운영위원회의 독선을 막기위하여 운영위원 18人, 의장단(총대의원회의장과 단대의장) 16人, 복학생7人 이내로 구성되는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를 결성하고 복학생은 표결권이 없이 고문으로 참석케 할 것을 의결하였읍니다. 1인당 1,000원씩의 회비는 각과별로 걷는 중이었고 민주화투쟁위원회(가칭)는 복학생들의 불참통고와 의장들의 저조한 참석률로 인하여 결성조차 되지 못하였읍니다. 복학생들은 불참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고 단지 그런 식의 기구에 참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란 이야기를 5월7일경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읍니다.

1. 5월7일 15:00 ~ 5.8 10:00시 사이에는 사범대 인문대 약대의 공동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대회가 있었으며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은 왜 해제되어야 하는가"였다고 알고 있으며 저는 참석치않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2. 5월8일 15:00 ~ 5월9일 10:00시 사이에는 법대 경영대 미대의 공동 시국성토대회 및 자유언론 쟁취대회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때 송건호씨와 해직기자들이 참가하였다고 알고 있으며 학생회관에서는 철야토론회가 약 1000명정도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세한 것은 제가 참석치 않아 알수 없읍니다.

1 ① 5월9일 15:00시 ~ 5월10일 10:00 사이에 공대 음대의 시국성토 및 교내시위 철야토론회가 있었고 참가인원은 약 1500명 주제는 「비상계엄해제」와 「정부개헌 반대」등이었다고 알고 있으며 농성장은 학생회관이었읍니다.

② 같은날 17:00부터 문무대에 입소한 1학년생 위문이 있었으므로 총학생회장은 같은 날 17:00부터 고대 학생회관에서 있을 예정이던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과 제가 회의에 참석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5.9 17:00시 ~ 5.10 05:00 시 사이에 고대 학생회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성대 서강대 건대 숙대 동국대 숭전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외국어대 전북대등 주로 서울시내 약 20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단이 모였는데 사회는 고려대 학생회장 신계륜이 맡았으며 이 회의에서 채택된 현시국에 관한 제2차 공동성명서의 초안도 고려대학교에서 작성하였고 그 내용은 역시 "비상계엄 해제" "정부개헌 중지" "언론자유보장" 등이었읍니다. 이때 건국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총학생회장들이 서울대에서 괜히 무책임하게 "14일 휴교령이 내리면 15일 오후3시 영등포로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5월2일 심재철이 발표하여 이 말이 휴교령에 관계없이 무조건 15일 가두시위를 벌이겠다는 것으로 와전되어 터무니없는 "15日 봉기설"이 나돌게 되었다고 공격했읍니다. 그러나 휴교령이 내릴 경우 그 다음날 가두시위를 벌인다는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5월2일 발표에는 별 이의가 없었고 강남 강북 강동지역의 학교들끼리 모여 의논한 끝에 만일 휴교령이 내리면 강남의 대학은 영등포로터리에, 강북은 공덕동로터리, 강동은 청량리와 서울운동장의 2곳에 오후 3시 집결키로 결의되었읍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가 학생회장단 회의)

1. 5월11일 15:00시 ~5월 12일 05:00시에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소회의실에서 서울대 주최로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대유공전 등 주로 서울시내 약 2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며 주최학교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은 5월9일 고대회의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지명수배됨.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판결문에 증거의요지로 판시됨.

이 사회를 보았고 2명 이상 참석한 학교에도 발언권은 한사람에게만 허용되었읍니다. 처음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 총대의원회의장 류시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 등 4명이 참석하였으나 발언권이 심재철에게만 있었으므로 저는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치는 않고 들락날락하여서 자세한 회의의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이날 회의는 내용상 심재철 신계륜 등의 주도하여 4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결의문은 5월12일 09:00시 서울대총학생회장실에서 기자들에게 배포되었읍니다. 결의문의 내용은 ① 15일 가두시위설을 공식부인하고 교외시위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것 ② 申 총리와의 TV 생방송대담을 제의 ③ 휴교령을 반대하며 휴교령이 내릴 시 과감히 싸울것이라는 것 ④ 5.16 15:00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대학대표자회의 소집을 결의한다는 것이었읍니다.

1. ① 5월12일 09:00시경 본부 학생처장실에서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를 만나 5월11일 15:00시 ~ 5월12일 05:00에 있었던 서울시내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15일 가두시위설을 부인하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의문을 전달하자 이수성교수는 문교부차관실로 전화를 건후 "문교부에서는 벌써 이 결과를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이제 휴교령 걱정은 없어진 셈이라고 말한 적이 있읍니다.

② 5월12일 15:00시 ~ 21:30 사이에는 사회대 자연대 가정대의 연합 시국성토대회와 교내시위가 아크로폴리스광장 및 교문에서 있었고 진행은 사회대 학생회장 유승호,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 가정대 학생회장 김경미가 공동으로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저는 11밤 철야회의로 피곤해서 오후에는 학생회관 라운지 소파에서 낮잠을 잤으므로 자세한 진행상황은 모르나 주제는 「노동3권보장」 「농민권익보장」 「물가고의 원인」등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낮잠을 잔 후 17:00부터 총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사회대대의원회의장 유현오(사회3)

인문대 〃 조병식( 3)

경영대 〃 송덕호(경영3)

법 대 〃 이승관(법 3)

사범대 〃 황원기(지학3)

공 대 〃 윤치은(화학공학3)

자연대 〃 신영길( 3)

약 대 〃 류재하(제약3)

가정대 〃 황선유( 3)

의 대 〃 최병순(본과3)

등과 함께 총무부장 이용화군으로부터 1학기(예산 총 1억1천만원규모) 예산편성표 설명을 듣고 예산심의절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데 약 21시경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저를 찾는다 하여 나가보니 총학생회장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운영위원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빠져나가고 있었고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복학생 김병곤(경제4)은 저에게 「계엄군이 13일 00:00시 ~ 03:00시에 수도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휴전선부근에 긴장이 있다. 이사실은 방송국에서 확인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 학생회관 2층 라운지의 농성학생 뒤처리를 저에게 맡긴 후 총총히 복도를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총대의원회 사무국실의 단과대학의장들에게 전하고 의장단회의를 해산시킨후 21:10경 학생회관 2층 라운지로 건너가 농성중이던 약 1000여명의 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각 과별로 모아 21:30경에는 거의 해산시켰읍니다. 그때 저와 함께 학생들을 해산시킨 운영위원은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가 있었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문부대 퇴소환영식)

1. ① 5월13일 11:00 ~ 13:30 사이 교문앞에서는 문무대를 퇴소하는 1학년 퇴소환영식이 개최되었는데 약 4000여명의 학생이 집결하였는데 연사들은 하나같이 12일 밤 계엄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도 제대로 않은채 도망친 학생회간부의 비겁함을 비난했으며 다시한번 총학생회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읍니다.

2. 이 때 연설을 잘하는 김부겸이 다시 등장하여 "학생회가 잘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총학생회의 잘못이 아니라 복학생들이 소위 통박을 잘못 굴려서 그랬다"고 말하여 총학생회를 다시한번 구제해 주었으며 그의 말로 미루어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김부겸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그러나 폭락한 총학생회의 인기와 권위는 다시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15일 학생총회에서 가두 진출 여부를 결정짓겠다"고 발표하였읍니다.

② 이 날 22:00부터 고대 학생회관에서 고대가 주최가 되고 역시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서강대 건대 중앙대 외대 숭전대 명지대 국민대 한양대 이대 숙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총신대 서울신대 등 7개 신학대학을 합쳐 약 25개 대학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읍니다. 이날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에서는 18:00부터 가두시위 실행여부를 놓고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제가 고대에 가기위해 21:30경 학교를 나설 때 분위기는 가두시위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총 학생회장 심재철은 최고책임자가 남아서 우리학교 거취를 오늘밤에 결정하겠다면서 저 혼자 고대로 가라고 부탁하였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22:30경 고대에 도착해보니 이미 회의가 시작되어 있었고 제일 먼저 연대 대표(총학생회장 박광호가 아니었읍니다)가 13일 연대의 신촌 및 광화문 가두시위 상황보고는 하면서 "연대가 제일먼저 십자가를 진셈이고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싸울테니 타대학도 이때 같이 가두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대 총학생회장 신계륜은 "이미 내일(14日) 11:00시 고대로 가두시위를 결정해 놓았다"고 이야기 했으며 외대 중앙대 명지대 등 다수의 학교들이 언제든지 가두로 나올 수 있다고 하였읍니다. 대세가 그쪽으로 기울자 저는 학교를 떠날 때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아무래도 가두로 나가야 할 것 같으니 가 보고 대세가 기우는대로 결정하고 오너라."고 귀띔한대로 "타대학이 모두 나간다면 우리는 15일날에 가두로 나가겠다. 왜냐하면 14일은 일학년생들이 문무대훈련의 피로를 씼느라 학교를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서울大도 15일에는 가두시위를 하겠다고 말하였읍니다. 뒤늦게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형난옥이 너무 성급한 짓이라고 이견을 내놓았으나 연대쪽의 강한 반발과 이미 기울어진 대세 때문에 역시 가두시위를 하기로 하였읍니다. 이 회의는 14일 05:00시에 끝났습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가. 및 15.의 가두 시위사실)

1. ①5월 14일 07:00경 학교로 돌아와보니 운영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사대 영어과4)

부회장 김학진(공대 조선공학3)

인문대학생회장 노창준(동양사3)

사회대 〃 유승호(경제3)

경영대 〃 정철상(경영3)

공대 〃 양점식( 3)

자연대 〃 배명규( 3)

등이 있는데서 회의 결과를 보고하자 운영위원들은 하나같이 "오늘(14日) 나가면 휴교령이 내릴텐데 내일(15일)까지 미룰 수 없다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을 중심으로 교문돌파계획을 짰고 저는 약 10:30까지 눈을 붙였읍니다. (총여학생회장실 소파에서)

② 11:00시 경부터 단과대학 학생회장의 지휘아래 단대별로 아크로폴리스에 집결한 인원은 7000명 정도였으며 그중 음대 미대는 낙성대쪽 후문, 공대 법대는 귀가하는 듯이 학교를 나가 봉천동4거리, 신림동4거리에서 12:00경부터 집결시위하도록 되어 있었고 가정대 여학생들은 공대 공사장쪽에서 돌을 주어 날랐읍니다.

저는 이 학생총회에서 사회를 보면서 13일 밤 고대회의 결과를 보고하였고 대다수 학생들이 박수를 쳤고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은 간단한 가두시위 선언을 하였읍니다. 심재철의 가두시위선언이 끝난 11:30경 저는 마이크를 들고 모든 학생들이 교문으로 힘차게 뛰어갈 것을 지시하였읍니다. 이때 학생들이 막 아크로폴리스를 빠져나갈 즈음 학생처장 이수성교수가 총학생회장 심재철에게 "학생들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평소의 주장대로 "교수들이 중재를 해서 학생과 경찰의 피흘림이 없는 평화적 가두시위를 할 수 있도록 교섭할테니 30분간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으나 학생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제안이라고 하며 무시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교문앞의 약 200여명의 전투경찰 지휘자에게 길을 비켜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1시 50분경부터 두 대의 페퍼포그 차가 맹렬히 뿜어대는 페퍼포그와 최루탄터지는 소리, 최루탄 연기 자욱한 가운데 돌이 나르기 시작하였고 약 40분간의 투석전 동안 무수한 돌멩이와 페퍼포그가 오간후 약 12시 30분경 경찰이 저지선을 풀어주었읍니다. 부상자가 속출하자 (나중에 듣기로 약 30명의 경찰이 부상당하였다함) 교문에서의 저지선을 하는 수 없이 뚫어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 신림4거리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나 별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독산동을 거치거나 대방역을 거쳐 14:30경에는 영등포시장 앞에 서울대생만 5000여명 영등포역앞에 중앙대 숭전대등과 섞여 서울대생 약 3000여명이 집결하여 있었읍니다. 교문을 출발한 후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해제" "신현확, 전두환 퇴진" "정부개헌 반대" "언론자유보장", "농민권익보호" "서민생활보호" "노동3권보장" 등 5월2일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서 각 단대별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하나씩 나누어 준 구호였으며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횟불" 등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③ 14:40경 학생 약 500여명이 영등포시장 앞 도로에서 위와 동일한 구호 노래를 외치며 연좌하고 있을 때 학교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부총장, 학생처장, 교무처장, 사회대학장인 이현재교수, 인문대학장 민석홍 교수등 약 10명의 학처장들이 나타났고 약 40분간 연좌하는 동안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는 "교수들이 앞장설테이까 더 이상 나가지 말고 평화적으로 귀교하자"고 총학생회장 심재철군에게 말씀하셨으나 학생들사이에 "광화문으로라는 말이 퍼져있어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학교로 돌아간다고 메가폰으로 이야기하자 야유가 쏟아져 나오고 학생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심재철 학생회장은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가두시위할 것을 결정 발표하였읍니다. 저는 성대가 약해 영등포까지 오는동안 목이 다 쉬어버렸으므로 학생들을 지휘할 생각을 포기하고 학생들 틈에 섞여있었고 영등포를 떠난후 그날은 교수님들은 다시 뵌 적이 없읍니다.

④ 15:30경 영등포를 출발한 서울대생은 반씩 나누어 한 패는 여의도 통과 마포를 지나 서울역으로 가두행진했고 나머지 반은 제2한강교 신촌로타리를 거쳐 광화문으로 가려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막혀 일단 굴레방에서 흩어졌다가 약2500여명이 마포를 돌아 서울역으로 행진하였읍니다. 이때부터는 학생회간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19:00시~22:00시 사이 학생들은 서울大. 건대 중앙대. 이대. 성대 동국대 등이 마구섞여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경찰 저지선은 시청-광화문 사이만을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시청앞 광장~서울역광장, 을지로 등을 온통 비를 맞으며 "비상계엄해제" "전두환 신현확 퇴진"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 하였읍니다. 이 때 저는 학생들틈에 섞여 있었는데 21:30이 가까와오자 초조해졌고 학생들을 해산시킬일이 걱정되었읍니다.

또 경찰은 마치 공격할 태세를 취하며 페퍼포그를 뿜기 시작했읍니다. 제가 얼핏보니 경찰저지선에 서서 지휘하시는 분이 평소 서울대 정문에 오시던 분(계급은 총경) 이어서 제가 손을 흔들며 달려가서 인사를 드리고 22:00까지 해산시킬테니까 그동안은 페퍼포그를 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자 응낙해 주셨읍니다. 그래서 22:00경 학생들을 (숫자는 알수 없었음) 시청앞 광장 프라자 호텔쪽에 집결시킨뒤 애국가와 만세삼창을 하고 정확히 22:05에 완전히 해산시킨 일이 있었읍니다.

1. ① 5.15 12:00 아크로 폴리스에서는 약 5000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총회가 열렸읍니다. 이 총회는 심재철이 14일 11시 30분경 휴교령이 내리지 않으면 15일 12:00에 학생총회를 아크로폴리스에서 다시 열겠다고 말한데 따라 개최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사회를 보았는데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여 서로 양보할 기미가 없었으므로 저는 중립을 지켰읍니다. 양쪽이 팽팽히 맞선 상태에서 총학생회장 심재철, 부회장 김학진이 상의하여 16:00 서울역광장에 집결하는게 어떠냐고 제 의견을 물어보았고 저는 좋다고 대답했으며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약 14:20경 "오후4시 서울역 집결"을 발표하고 학생총회를 마쳤읍니다.

이때 체육부 부장 박명기(체육 3), 문예부장 권혁철(공대 전산 3)등은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의 허락을 얻어 방송차를 마련하고 그것을 확인하러 학생처장실에 올라가서 이수성교수를 만났는데 그것이 약 15:40정도 되었을때 였고 이수성교수가 늦었으니 내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해서 운전기사, 처장, 심재철 그리고 제가 같이 학생처 승용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는데 서울대生들이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어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에게 "높은데 올라가서 찾아봅시다."라고 말씀드리니까 이수성교수가 심재철과 저를 데리고 대우빌딩 21층의 어떤 사무실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저희학교 학생들이 역광장에 있음을 발견한 심재철과 저는 학생처장님과 헤어져 역광장으로 내려왔읍니다.

② 서울역광장에 집결한 약 4000여명의 서울대生은 이때부터 21:00시 해산 때까지 계속 역광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며 연좌만 하다가 20:30경 서울大 총학생회장 심 재철이 서울역에 집결한 각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결정한 사항을 발표한다면서 이의가 있드라도 따라 줄 것을 당부한 후 각 학교별로 귀교하거나 해산한다고 발표하였읍니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지 잘 모르겠으며 이어 심재철은 "다음단계의 행동은 오늘 저녁(15日) 22:00시 고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어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읍니다. 학생들에게 발표할때 발판으로 이용된 것은 서울대학교의 마이크로버스였으며 이 마이크로버스에 방송기재를 싣고 갔었읍니다.

③ 이 발표에 따라 서울大生중 약 2000여명은 21:00경 서울역을 출발하여 동일한 구호를 외치면서 용산, 노량진, 장승백을 경유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고 24:00시가 다 돼어서야 봉천동 고개를 넘어 학교에 도착했읍니다. 총장님의 지시인지 학생처장님의 지시인지는 알수 없으나 노량진역 못미쳐 약 5대의 스쿨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여학생일부와 낙오자들은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고 준비돼어 있던 라면과 우유를 먹고 각과 사무실 혹은 도서관에서 취침한 후 다음날 아침 모두 귀가 하였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울역 광장에는 낮에는 약 5만의 학생 5만의 시민이 모여있어 농성하기에 괜찮지만 밤이 되어 춥고 배고프고 시민들마저 다 귀가해버리면 무슨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일단 해산시킨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④ 이날 밤에(22:00) 고대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는 심재철 혼자 참석하였으므로 상세한 결과는 알지 못하며 별로 중요한 결정사항없이 16일 15:00부터의 梨大에서 열릴 전국대학대표자회의로 미룬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 심재철 공소사실 13.2.의 나. 학생총회 사실)

1. 5월 16일

① 12:00경 총학생회장 심 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 홍동이 저에게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사표를 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가보라고 하였읍니다. 이야기 인즉 15일 밤 서울역에서 학생들이 해산할 때 이수성 교수가 내무부장관님과 협의해서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는데 15일 밤 이 수성교수가 학생들에게 평화적으로 해산하라고 했을 때 "학생처장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불신감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많았고 또 실제로 高大 학생들이 귀교도중 경찰과 충돌했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것이 사표의 이유였읍니다. 제가 처장실에 올라갔을 때 처장님은 총장실에 계셨으므로 저는 총장 비서실에서 약 5분간 기다리다 처장님과 함께 학생처장실로 돌아왔읍니다. 그리고는 정작 사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16日은 가두시위를 안해도 될 것 같다는 말씀만 드리고 같이 교직원식당에서 점심으로 육개장을 먹은후 본부 앞에서 헤어졌고 이때 학생처장 이 수성교수는 "자꾸 강경파에게 밀리지 말고 소신껏 학생들의 피를 흘리지 말고 활동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후 저는 이수성교수를 만난적이 없읍니다.

② 13:00시 ~ 15:00시 교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는 가두진출문제를 놓고 다시 학생총회가 열렸으나 이틀간의 피로가 겹쳐 가두진출 하고자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므로 사회 및 진행을 맡아본 총학생회장 심재철 및 운영위원들의 주장대로 당분간 가두시위 없이 유인물을 통해 시민들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는 홍보활동을 할 것이 결의되었읍니다. 저는 이 회의에 참석지 않고 학생식당에서 쉬고 있다가 16:00시경 일찍 집으로 돌아갔읍니다.

③ 5.16. 15:00 ~ 5. 17. 사이에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대학 대표자 회의에는 심재철과 이홍동이 참가하였고 저는 그 후 위 두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한적이 없으므로 회의의 경과나 흐름 내용, 결정사항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읍니다. 단지 뉴스에 59개 대학 90여명 참석이라는 사실이 방송되었기에 알고 있을 뿐입니다.

1. 5월 17일

① 10:00경 김 병곤(복학생, 경제과4)이 저를 찾아와 총대의원회사무국실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금 대세가 우리한테 유리하다, 이대에서 열리는 총학생회장단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런지 모르지만 이 대세를 몰아 19일과 20일에도 가두로 진출해야 한다."고 말해 저는 "예, 알았읍니다. 하지만 제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총학생회장이 돌아오면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라고만 대답하였읍니다.

② 11:00시 ~ 12:00, 사이에

16일 학생총회에서 유인물로 홍보활동을 하려했으므로 도서관과 IMC(교육매체제작소)의 인쇄기 사용을 허락받으러 교무처장님과 학생처장님을 각각 교무처장실 학생처장실에서 만나 부탁드렸는데 교무처장님은 I・M・C관이 교무처소관이고 원칙적으로 교육매체를 제작하는 데만 사용되게 되어있으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하셨고 이 수성 학생처장님은 학생처 소관인 도서관 인쇄기에 대해서만 도서관장앞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협조토록하겠다고 약속하셨읍니다. 그러나 실제로 12:50경 도서관에는 직원들이 (토요일이라) 다 퇴근한 뒤여서 사용하지도 못하고 총학생회부회장인 김학진이 16:00경 총장님을 공관에서 찾아뵙고 허락을 맡아 IMC관의 마스터 인쇄기는 약 2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읍니다. 여기서 어떤 유인물을 인쇄하였는지는 저로서는 잘 모르며 복학생 이흥국 황광우 등이 거기에 관여하였다는 것 밖에 모릅니다.

③ 원래 5.16.15:00부터 梨大에서 열린 전국대학대표자 회의에 참석하러 간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학생활동위원장 이 홍동이 돌아오면 5월17일 16:00부터 총학생회장실에서 앞으로의 방향수립을 위하여 운영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위 두사람이 돌아오지 않아서 회의는 하지 못하고

총학생회 부회장 김 학진 (조선공학3)

인문대 학생회장 노 창준 (동양사3)

경영대 〃 정 철상 (경영3)

법대 〃 이 철수 (법3)

사범대 〃 진 영효 (교육3)

공대학생회장 양 점식

총여학생회장 이 재인 (교육3)

가정대 학생회장 김 경미 (의류3)

문예부장 권 혁철 (공대 전산3)

등과 같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이대에서는 무슨회의를 24시간 넘게 하느냐면서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18시25분경 이대쪽에서 익명의 학생(서울大生)으로부터 총학생회장단 검거소식이 들어왔으나 믿을수가 없어서 조선일보 한국일보등에 집행부실에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별따른 소식을 얻지 못하였고 고 병익 총장님도 모르고 계셨고 이 수성 학생처장님은 출타중이어서 "혹시 연락오면 학교로 전화주시라고 전해달라"고 댁에 부탁드린 후에 19:10 정도에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본인이 받지는 않았으며 누가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으나 내용은 "이대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심 재철의 검거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고 19:30경 이화여대의 평학생 두 명이 도서관에서 목격했다면서 학생회장실에 찾아와서 검거소식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비슷한 시간에 총학생회장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와 노량진에 있다는 전화가 왔읍니다. 저는 19:10경 이 홍동의 전화를 받고나서 사실임을 확신하고 학생회관 각 방을 다니면서 전달해서 집행부실에 있던 학생들을 귀가토록했고 학생활동위원회실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복학생 이해찬, 이범영, 김병곤, 연성만, 심상완 지명수배

외 3명정도 도합 8~9명이 있었는데 저는 소식을 전해주고 다시 총학생회장실로 돌아왔읍니다. 약 20:30 ~ 21:00시 경 학생활동위원회실에서 있던 복학생들이 총학생회장실에 들어와서 "사태가 매우 급박한 것 같으니 태연한 척 말고 빨리 피하자."고 말하고는 자기들먼저 학생회관에서 빠져나갔읍니다.

그리고 나서 21:00시~22:00사이 대부분의 운영위원 들이 빠져나갔고 20:10경 제가 학생처장 이수성교수의 전화를 받았을때 운영위원중 경영대 학생회장 정철상군과 공대부회장 안봉수가 남아있었는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의 법적의미를 학생들은 잘 모를테지만 어쨌든 빨리 피해서 나가라" "전화거는 곳은 문교부 차관실이다"는 내용의 전화를 학생처장 이수성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후 이 두사람마저 빠져나가고 저와 체육부 차장 문호준(체육2), 복학생 이흥국, 이흥국의 여동생등 4명이 총학생회장실에 남아있다가 23:40경 경찰에 연행되었읍니다.

1. 유인물은 날짜별로 배열할 수 있을만큼 제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므로 따로 진술하겠읍니다.

① 저희 학교내의 등사시설은 총학생회에 수동식 윤전기 1대, 등사기 2대, 각 단과대학 학생회 및 편집실에 최소한 1개의 등사기가 있고 각 과마다 과에서 나오는 유인물이나 학생들의 주소록을 만들기 위한 타자기 및 등사기 수동식 윤전기 혹은 복사기가 있읍니다. 그리고 도서관이나 IMC의 인쇄기는 여태껏 학생활동에 쓴 적은 이번의 IMC 인쇄기 이용이 처음입니다.

이번 14日・15日 가두시위를 전후하여 배포된 유인물은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시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사실을 고발한다" "물가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계엄하의 언론통제"등 6~7종이 되나 그 중 제가 알고있는 것은 이흥국(복학생, 법4) 황광우(복학생, 경제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정치4) 사회부장 허남정(철학3) 지명수배 후 합수부 진술서 작성

등이 유인물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이번에 나온 유인물중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이 박문식(경제4)군에 의해 초안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유인물 인쇄 및 배포는 총대의원회 결의문 외에는 저와 무관한 일이기 때문에 제가 유인물에 대해서 더 상세히 아는 바는 없읍니다.

1. 위 진술이 사실과 틀림 없음을 확인합니다.

1980. 6. 12

자술인 柳 時 敏
 

이영란 기자  joy@simin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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