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 ‘베끼기’

시민일보 / 기사승인 : 2002-12-15 16: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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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정치행정팀장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건 공약들을 보고 있노라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쩜 그렇게 닮은꼴들인지 모르겠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얼마전 ‘군 복무기간 단축’ 공약을 비슷한 시기에 내걸었다. 그러자 양당은 이를 두고 서로 “내 것을 베꼈다”며 한 차례 `표절 공방’을 벌인 바 있다.
비슷한 공약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새정치’ 공약에 대해 “오늘 노 후보가 급조해 내놓은 약속은 지난 8일 이회창 후보가 제시한 정치개혁 8대 약속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또 “고위공직자의 첫 재산형성과정을 공개하겠다는 것은 우리당이 제시한 ‘백지신탁제’가 호응을 얻자 불쑥 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디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민주당인가. 민주당도 선대위 정책본부를 통해 “이 후보가 `개인신용회복 종합대책 마련’을 약속한 것은 우리당이 지난 3일 발표한 정책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낙연 대변인은 논평에서 “향토예비군과 민방위 제도개선도 우리당 공약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농가부채 대책 등에 대해서는 “재탕”이라고 폄하했다.

이쯤되면 누가 누구 것을 베꼈다는 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민주노동당이 오히려 당당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독자 공약이 얼마나 많은가. 감히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공약들을 눈치볼 것 없이 마구 쏟아내고 있지 않는가. 물론 현실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모습이 너무나 당당해 보여 호감이 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정당은 정체성이 중요하다. 민주노동당은 그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당당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유권자들이 누구를 선택하려면 최소한 그 당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명색이 대통령 후보라면서 공약을 베끼고 표절하다 못해 중대한 정치개혁 방안조차 흉내내고 따라한다면 그것은 한심스럽다 못해 측은한 노릇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할지 정말 막막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왜 부동표가 그렇게 많은지 깨달아야 한다.

나는 속 시원한, 그러나 거짓이 아닌 진실이 담긴, 당의 정체성이 실린 독자적인 공약을 기대한다.

이것이 지나친 기대일까? 재벌규제를 말하려니 재벌 눈치가 보이고, 수입개방 자유화를 말하려니 농민들 눈치가 보이고, 인력시장 개방을 말하려니 노동자 눈치가 보이고, 이래서야 제대로된 공약이 나올수 있겠는가.

재벌을 위한 정당인지, 아니면 노동자·농민을 위한 정당인지 그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게 옳다. 이눈치 저눈치 보다보면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도 이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수도권 시민들 눈치보랴, 충청권 시민들 눈치보랴 그러다 제대로 할 수나 있을는지 걱정스럽다.
오죽하면 공약 ‘베끼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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