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웃기는 이야기] 정신적 식민지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0-10-19 14: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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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 전 명지대 부총장
임성빈 전 명지대 부총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조교로 발령 난 다음해인 1969년부터 여러 교수들의 대강(代講)을 했다. 

 

당시 필자는 문교부(당시)의 발령을 받은 교수요원으로서 단순히 교수를 도와주기만 하는 요즈음의 조교들과는 달리 석사과정, 박사과정 등 학위과정만 순조롭게 밟으면 전임강사, 조교수 등으로의 진급이 거의 보장된 입장이었다. 

 

그런데 대강을 맡은 과목 중의 하나인 도로공학을 강의하다가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16 군사정변 다음해인 1962년까지도 모든 도로행정이 우리나라 법령이 아닌 ‘조선총독부 도로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분야도 확인해 보았더니 역시 마찬가지여서 비록 중간에 6·25를 겪었다고는 하나 광복 후 17년, 정부수립 14년이 되도록 헌법 등 기본법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실정법령(實定法令)들은 조선총독부령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자유당 정권 내내, 그리고 민주당정권 1년 동안에도 정치판은 싸움질만 하고 공무원들은 할 일은 챙기지도 않으면서 눈치들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73년 봄에는 건설부에서 도로구조령을 개정하기로 하였다며 자문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에 참여해보니 말이 개정이지 그 직전에 일본에서 개정된 것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런대로 원본과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검토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실 일본 도로구조령도 미국 것, 특히 교통용량 부분은 미국의 도로교통용량지침(HCM, Highway Capacity Manual)을 많이 참고하고 있으나 기본교통용량(시간당 1차로 당 통과할 수 있는 최대자동차대수)만은 미국의 2,000대/시간 대신 20%가 더 많은 2,400대/시간으로 돼 있었다. 

 

그 이유는 일본차의 평균길이가 미국에 비해 상당히 짧아 같은 차간거리를 유지하면 차가 20%정도 더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의 조사결과와도 잘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직진은 물론 좌, 우회전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나 일본은 직진에만 적용하였을 뿐 좌, 우회전의 경우에는 미국의 기준을 그대로 사용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래서 과업책임자에게 미국 HCM을 대조해가며 설명하고 이것을 바로잡자고 하자 필자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과업이 끝나면 감수자는 어차피 일본 원본과 대조해가며 검토할 텐데 일본 것과 다를 경우 그것을 설명하고 납득시키기가 곤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당시, 적어도 교통행정분야에서는 일본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독자적 판단에서 한 일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도 1년 정도마다 자리를 바꾸는 순환보직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최근에는 정부와 일을 해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광복 후 30년이 다 되도록 일본의 정신적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웃기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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