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을 막은 두 소련군 장교 이야기

시민일보 / 기사승인 : 2019-03-11 14: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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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1983년 9월26일 아침, 소련방공사령부 당직장교 스타니슬라브 페트로프 대령은 미국을 감시하는 인공위성이 보낸 급보를 받았다. 미국이 다섯 기의, 핵을 장착한 미니트맨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 당시는 美蘇 긴장이 극에 달하여 있을 때였다. 그해 9월 초 소련 전투기는 사할린 상공에 들어온 대한항공 007편 점보가 미국 정찰기 RC-135라고 오인, 격추시켜 269명이 죽었다. 미국은 세계 여론을 자극, 對蘇 압박을 가하며 제재를 걸고 있었다.

페트로프 대령은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하부의 정보수집부서에 전화를 걸어 眞僞를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미사일이 소련을 향하여 날아오는데, 판단을 잘못하면 반격의 시간이 사라진다. 5분의 여유밖에 없었다.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사안에 대하여 페트로프 대령에게 그 판단의 임무가 주어진 셈이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은 조기경보 시스템의 誤報라고 판단하였다. 미국이 소련을 선제공격한다면 다섯 기만 쏘겠는가?

그는 50-50의 확률이었지만 상부에 '오작동'이라 보고하였다. 이게 핵전쟁을 막았다는 전설의 기초가 되었다. 2013년 그는 드레스덴 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며칠 전 77세의 나이로 지난 5월17일에 죽었음이 밝혀졌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소련 인공위성이 구름에 비친 태양의 빛을 미사일 발사로 오인하였음이 드러났다.

1995년 1월25일 러시아의 모스크바. 보좌관이 가방 하나를 옐친 대통령에게 건넸다. 4분 전 노르웨이 근해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항적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옐친이 발사 단추를 누르면 러시아의 핵미사일이 미리 지정된 목표물을 향하여 날아갈 판이었다.

러시아군 참모총장 콜레스니코프 장군도 다른 곳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로켓이 단계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봐서 중거리 탄도 미사일로 추정되었다. 西유럽의 나토 동맹국에 배치된 美製(미제) 퍼싱 미사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했다. 항적의 경로로 봐서 미국 잠수함에서 모스크바를 목표로 발사한 듯했다. 참모총장은 옐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은 6분 안에 발사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수 분 더 항적을 관찰한 결과 러시아 지도부는 미사일이 러시아 영토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항적은 노르웨이가 오로라를 연구하기 위하여 쏜 과학 로켓이었다. 노르웨이는 발사 예정 사실을 러시아에 통보하였으나 이 정보가 군 당국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오해가 빚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냉전 시대의 核 사고 보고서를 종합하면 핵무장 국가의 핵공격으로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보다는 사고로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한다. 작동 실수로 비행기에서 핵폭탄을 떨어뜨린다든지. 핵 탑재 비행기에서 불이 난다든지, 핵 탑재 미사일의 폭발이나 레이더와 컴퓨터의 오작동 같은 사례들이 있었다.

1958년 마크 36형의 수소폭탄을 실은 미국의 B-47 폭격기가 모로코의 미군 기지에서 활주로에 진입 중 불이 났다. 폭격기는 두 동강 났고, 불은 두 시간 반 계속되었다. 기지 요원들은 긴급 철수하였다. 다행히 핵탄두의 화약은 폭발하지 않았다. 이 사고는 비밀에 붙여졌다.

그 6주 후 마크 6 핵탄두를 싣고 가던 미군 폭격기 안에서 한 승조원이 폭탄 투하 수동 레버를 잘못 건드렸다. 핵탄두가 떨어졌는데 이 탄두에 핵물질 코어가 삽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폭약만 터져, 땅에 큰 구멍을 냈을 뿐이었다.

1960년 콜로라도의 北美방공 사령부(NORAD) 컴퓨터가 방금 소련이 미국을 향하여 전면적인 핵미사일 공격에 나섰다는 경보를 발령했다. 핵폭탄이 수 분 이내로 떨어질 확률은 99.9%라는 것이었다. 당시 흐루시초프는 유엔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욕에 있었다. 이를 근거로 사령부는 오작동이라고 판단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린란드의 조기경보 시스템이 노르웨이 쪽에서 떠오르는 달을 미사일 발사로 인식하였다는 것이었다.

1979년 북미방공사령부 컴퓨터가 소련의 전면공격이 시작되었다고 경보했다. 미국의 폭격기, 미사일 기지에 비상이 걸렸다. 공항 관제소엔 민간 여객기에 대한 즉시 착륙 명령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주의가 하달되었다. 이 경보 또한 교육용 워 게임 테이프를 한 기술자가 컴퓨터에 잘못 끼운 데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1년 뒤에도 비슷한 소동으로 카터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브레진스키를 밤중에 깨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고는 컴퓨터의 결함 때문이었다.

미국의 핵전쟁계획은 핵공격이 임박할 때의 대응전략이 너무나 단순하였다. 핵 공격에 는 '전면적인 핵공격'으로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경우에도 적의 핵공격을 받은 이후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즉각 대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시간에 쫓기면 오판을 하기 쉽다. 여기에 핵 사고의 위험이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소형화하여 미사일에 갖다 붙이는 이른바 核미사일 實戰배치가 기정사실화되었다. 일단 核미사일이 실전배치된 후엔 의도적인 핵사용에 의한 재앙보다는 상호 오해나 기계 오작동에 의한 사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1962년 10월27일, 미국이 쿠바에 배치된 소련 핵미사일 철거를 요구하면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소련 핵 잠수함 B-59호가 미국 함대에 발각되었다. 미국 함정은 폭발력이 약한 폭뢰를 터트렸다. 소련 잠수함은 해상봉쇄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으나 물 속에서 본부와 교신을 할 수 없었다. 근처에서 폭뢰가 터지는 충격을 느낀 잠수함 지휘부는 전쟁이 났다고 판단하였으나 본부와 연란을 할 수가 없었다. 함장은 핵어뢰를 발사하기로 하였다. 교전 규칙은 이런 경우 발사는 고참 장교 3명이 전원 합의로 하게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이 토의를 벌이는데 정치장교는 함장의 견해에 동의하였으나 동승하고 있던 잠수전단 지휘관 바질리 아르키포프가 반대하였다. 그는 이 잠수함에서 서열 2위였으나 1961년 그린랜드 근해에서 발생한 잠수함 K-19 사고 처리로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K-19호는 핵추진 잠수함인데 냉각시스템이 고장 나서 원자로가 녹아내릴 지경이 되었다.

아르키포프는 7명의 기관요원들에게 방사능 노출을 무릅쓰고 수리 작업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의 영웅적 노력으로 수리에 성공, 대재앙을 막았지만 그 뒤 한 달 내로 기관요원 7명은 전원 사망하였다. 2년 내로 15명의 승무원들이 더 죽었다. 이런 아르키포프였기에 핵어뢰 발사 반대를 고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핵어뢰 발사를 포기한 B-59 잠수함은 해상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함대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해상이었으므로 소련 잠수함은 귀환 길에 올랐다. 만약 이때 B-59 가 나가사키 원폭과 맞먹는 폭발력을 가진 핵어뢰를 미 해군 함대를 향하여 발사하였더라면 美蘇 간에 핵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이 사실은 쿠바 미사일 사건 40년 뒤에 밝혀졌다. 아르키포프는 1998년 72세에 죽었다. 死後에 핵전쟁을 막은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사망원인도 방사능 노출이라고 한다. 핵위기 때는 오판이 핵전쟁을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이다.

출처 : 조갑제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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