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동호직필

시민일보 / 기사승인 : 2007-10-07 17: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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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정치행정부장 일어난 일에 대해 똑 떨어지는 공통된 평가를 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카멜레온을 능가하기 일쑤다.

지나간 역사적 사건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떻게 기록했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이라도 천차만별로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사도세자의 부인이고 정조대왕의 모후로 알려진 혜경궁 홍씨의 경우를 보자.

그녀가 기록한 '한중록'을 보면 대부분 혜경궁 홍씨를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하게 돼 있다.

비정한 시아버지와 미치광이 남편간의 알력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의 처지가 가엾기 그지없다.

더구나 그 사이에서 자식(훗날 정조)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한 여인의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동정심이 강하게 작용한다.

반면 이덕일선생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과는 상반된 여인네의 이중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재평가되고 있다.

우선 영조와 사도세자가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사도세자를 끔찍히 미워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사도세자는 영조의 늦동이 외아들로서 왕의 관심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 영조는 25세인 1719년에 정빈 이 씨에게서 아들 효장세자를 보지만, 9년 만인 1728년에 잃게 되고, 그 후 영빈 이 씨로부터 사도세자가 태어난 건 1735년이니 실로 7년 만에 고대하던 왕자를 본 셈이다.

그렇다면 혜경궁씨는 멀쩡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미치광이로 몰아붙였다는 걸까?

오래전 의 일이니만큼 우리가 지금 그 진위여부를 결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의 그같은 이중적 태도는 당시 붕당의 격랑 속에서 사도세자와 친정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그녀의 친정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

때문에 혜경궁 홍씨가 친정 편에 서 기록한 '한중록'의 역사적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사도세자의 죽음 당시 영의정 이었던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단연 노론의 거두이자 수장이었는데, 노론이 사도세자를 제거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다.

역사는 진실하게 기록돼야 한다.

이점은 날마다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평가함으로써 여론을 주도하는 신문의 역할에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기초적 의무사항이다.

그런데 하루하루의 역사를 기록하는 오늘날 신문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실 혜경궁 홍씨의 이중적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신과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진실을 호도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억지스런 해석을 내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제 조.중.동 등 소위 메이저신문이라고 하는 매체들이‘대세론'에 휩쓸려 할 말을 못하고, 특정인의 눈치를 보는가 하면, 아예 그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따라 시시비비(是是非非), 정론직필(正論直筆), 춘추필법(春秋筆法) 등의 단어는 이미 상투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사실 저널리즘의 진정한 힘은 정론직필에서 나온다.

필자가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선배들로부터 ‘춘추필법’이라는 표어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이는 대의명분을 좇아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기록하는 논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와 유사한 의미로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인 동호(董狐)가 당시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직필함을 일컫는 말이다.

춘추시대 진의 영공(靈公)은 사치하고 잔인하며 방탕한 폭군이었다.

당시 정경(正卿)으로 있던 조순(趙盾)이 이를 자주 간하자, 귀찮게 여긴 영공은 오히려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조순의 집에 숨어든 자객은 그의 인품에 반해 나무에 머리를 찧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술자리로 유인해 그를 죽이려 했는데, 병사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조순을 이끌고 도망하였다.

조순은 국경을 넘으려는 순간, 영공이 조천(趙穿)이라는 사람에게 도원에서 살해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태사(太史)로 있던 동호가 국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군주를 시해하다.’

조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호는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대감께서 직접 영공을 시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대감은 정경으로서 국내에 있었고, 또 조정에 돌아와서는 범인을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께서 공식적으로 시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호직필이란, 이와 같이 권세에 아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연 오늘날 하루하루의 역사를 기록하는 신문이, 그리고 기자들이 이처럼 절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언론인으로서 한번 쯤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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