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완장'을 찬 조국, '심장이 없는 사상의 폭군'

시민일보 / 기사승인 : 2019-07-22 15: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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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조국의 분류에 의하면 한일갈등의 책임이 문재인 정권이나 쌍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유권자 1200만 명(30%, 한국갤럽 조사)은 利敵분자이거나 친일파가 된다. 권력의 완장을 찬 조국 씨는 이들을 제거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영국의 저술가 폴 존슨(Paul Johnson)은 ‘지식인들’(Intellectuals. Harper Perennial)이란 책에서 좌경 지식인들의 위선을 가차 없이 폭로한다. 버트란드 러셀, 폴 사르트르, 노엄 촘스키 등이 대상이다. 실존주의 철학을 설파하여 한국에서도 한때 인기가 높았던 사르트르에 대하여는 이렇게 썼다.

사르트르의 글들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퍼졌고, 그는 1960년 후반 이후엔 사회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운동의 학문적인 代父(대부)가 되었다. 그가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예측했어야 했던 것은, 그가 선동한 폭력의 희생자는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고, 그것도 흑인에 의한 흑인에 대한 폭력이었다는 점이다. 1975년 4월 이후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끔찍한 범죄로 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이 죽었다. 이 범죄는 ‘더 높은 조직’이라 불리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중산층 지식인 그룹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8명의 지도자중 5명은 교사, 한 명은 대학 교수, 한 명은 공무원, 한 명은 경제학자였다. 모두가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거기서 공산당에 들어갔고, 사르트르의 철학적 행동주의와 ‘폭력의 필요성’이란 敎理(교리)를 흡수하였다. 이 집단 살인자들은 사르트르의 이념적 아들들이었다.>

존슨은, 사르트르가 1960년대의 드골을 나치 같은 사람이라고 비방한 데 대하여 이렇게 썼다.

드골이 나치와 싸울 때 사르트르는 파리에서 연극을 쓰고 있었다.>

한신대 윤평중 교수는 수년 전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적 명성으로 얻은 부(富)와 영향력을 즐긴 사르트르는 6·25전쟁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한국의 북침(北侵)이라고 강변했다. 소련의 조직적 인권침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련에는 완벽하게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했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고발한 망명작가 솔제니친을 '시대착오적 인물'로 폄하했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反혁명적인 인물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한 사르트르와 온건개혁론을 편 소설가 카뮈(A. Camus, 1913~1960)의 절교(絶交)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언어학자에서 정치평론가로 변신한 미국의 촘스키는 캄보디아의 집단 학살을 부인하다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을 미국에 넘겼다. 폴 존슨은 한국의 좌파들도 숭배하는 촘스키의 변명이 네 단계를 거쳤다고 분석했다.

<蠻行(만행)에 대한 촘스키의 반응은 복잡하고 왜곡된 모습이었다. 마르크스가 (영국 수상) 그레드스톤의 예산관련 연설 내용을 고의적으로 조작 인용한 사실이 드러난 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추종자들이 보인 반응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촘스키의 定義(정의)에 의하면 미국은 인도차이나의 악당이다. 따라서 캄보디아 학살은 미국이 직, 간접으로 학살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기 전에는 일어났다고 인정할 수 없다. 촘스키와 친한 사람들의 반응은 네 단계를 거쳤다.

1. 학살이 없었다. 서구 선전기관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2. 작은 규모의 살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월남 신드롬’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니컬한 서구의 인도주의자들이 캄보디아의 고통을 이용한 것이다.
3. 살인은 처음 생각하였던 것보다 대규모이다. 이는 미국의 전쟁범죄 행위가 캄보디아 농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한 결과이다.
4. 권위 있는 캄보디아 전문가들 중 한 사람에 의하면 최악의 학살은 1975년이 아니라 1978년 중반에 일어났고 마르크시스트 때문이 아니라 보수주의자, 인종주의자, 그리고 反월남 요인들 때문이다. 요컨대 폴 포트의 범죄는 사실상 미국의 범죄이다.>

폴 존슨은 ‘지식인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배운 무식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요즘 우리를 향하여 설교를 하려고 드는 지식인들에 대하여 대중적 懷疑(회의)가 생기는 機微(기미)가 보인다.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행동하라, 이렇게 일을 처리하라’고 말하는 학자들, 著者(저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에 대하여 보통사람들조차도 ‘그들이 아무리 著名(저명)하다고 하더라도 그럴 권리가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지식인들은 멘토로서, 또는 모범사례로서는, 옛날의 신부들이나 마술을 쓰는 의사들에 비하여 더 현명하지도, 고귀하지도 않다는 믿음도 확산되고 있다. 만약 거리의 행인들을 무작위로 12명을 뽑아서 도덕적,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적어도 지식인 집단만큼 분별력이 있는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지식인들을 감시하라고 말하고 싶다. 비극적인 우리의 세기가 주는 큰 교훈 중 하나는 수백, 수 천만 명의 죄 없는 생명이 희생된 것은 인간성을 발전시키겠다는 (지식인들의) 계획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을 권력의 조종간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집단적인 조언’을 하려고 할 때는 특별히 감시를 잘 해야 한다. 지식인들이 만드는 위원회, 회의, 연대 조직 등을 조심하라. 똘똘 뭉친 지식인 단체가 내는 성명은 믿지 말라. 정치 지도자나 중요한 사안에 대한 그들의 단정적 평가를 디스카운트하라. 지식인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남의 말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다는 先入感(선입감)과는 달리 어떤 패턴의 상투적 행위를 잘 추종하는 이들이다. 어떤 집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들고자 하고 그런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만든 집단 속에서 지식인들은 극단적으로 추종적이다. 이것이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을 매우 위험하게 만든다.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행동 방향을 유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견해’나 여론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지식인들이 습관적으로 까먹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개념보다도 더 중요하므로 늘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독재자들 중 최악은 심장이 없는 사상의 暴君(폭군)이다.>

지식인들, 특히 학생과 학자들을 우대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특히 ‘심장이 없는 사상의 暴君’인 계급투쟁론자들, 진보와 민중이란 말로 守舊的(수구적) 本色을 숨긴 선동꾼들, 예술을 흉기화하여 국가와 국군을 해치는 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지식과 예술로 인간을 改造(개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설치는 ‘배운 무식자들’부터 멀리 해야 한다. 조국이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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