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처칠이 히틀러에게 이겼나?

조갑제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18-10-24 1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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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한때 김정일의 스승이었던 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는 김정일이 히틀러를 숭배한다고 증언했었다. 김정일과 김정은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핵공갈의 패턴을 보면 히틀러가 1930년대에 유럽을 상대로 공갈외교를 벌여 속속 영토를 확장해가던 수법이 생각난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부가 결전의지를 갖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파리에서 '거대한 환상'과 같은 反戰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는 프랑스 지도층의 정신이 썩고 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먹어치운(1939년) 것은 '이렇게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으로 독일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대중민주정치에선 정치인들이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英佛 지도층의 전쟁의지 박약을 그들에게만 책임추궁할 수는 없다.

英佛의 여론이 전쟁불사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초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뿐 아니라 국토전역을 점령한 것이 계기였다. 흥분한 여론을 의식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위협하자 뒤늦게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공약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도 히틀러는 이 약속을 엄포라고 해석했다.

여론에 둔감한 독재자들은 상대국의 여론을 무시하다가 혼이 나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이 고이즈미 수상에게 일본인 납치에 대해서 고백했다가 일본의 여론과 언론의 역공을 당해 日北 수교 교섭에 제동이 걸린 예가 있다.

히틀러를 가장 정확히 알고 연구했던 사람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양보는 결국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경고했지만 여론과 언론, 그리고 政界에서 따돌림만 당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처칠은 수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전쟁위험을 과장한 우익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존 루카스가 쓴 '히틀러 對 처칠'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은 1940년 영국 상공의 공중전을 무대로 설정하여 인류의 운명을 건 두 사람의 결투를 다루고 있다. 루카스는 이 책에서 처칠이 결국 히틀러를 이기게 된 것은 히틀러가 처칠에 대해서 안 것보다도 처칠이 히틀러에 대해서 안 정도가 훨씬 깊었고 정확한 점과 관계가 있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썼다.
'1940년에 처칠이 히틀러의 제1 라이벌이 된 것은 신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현대사에서 처칠이 히틀러를 이해한 정도로 외국의 라이벌을 熟知한 경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랬기 때문에 처칠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처칠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선동가일 때부터 그를 관찰했다고 한다. 1930년, 히틀러 집권 3년 전 처칠은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면 독일의 재무장과 세계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고 예언했다(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 참사관이 이런 처칠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한 문서가 있다).

'히틀러 對 처칠'에서 필자 루카스는 두 사람의 인간됨을 아주 재미 있게 비교하고 있다.

1. 히틀러가 국가주의자였다면 처칠은 애국자였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敵에 대한 증오심이 주류이지만 애국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주류이다.
2. 히틀러는 처칠을 호전적인 독일인의 敵, 시대착오의 반동주의자로 보았다. 처칠은 히틀러가 야만시대 惡의 재현인데, 과학기술로 무장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3. 히틀러는 증오심이, 처칠은 관대함이 성격의 主調였다.
4. 히틀러는 유머감각이 없었으며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처칠은 눈물을 잘 흘렸고 위기 때도 항상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5. 히틀러는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처칠은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6. 두 사람 모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독서를 많이 했다. 히틀러는 말을 중시했고 처칠은 글을 중시했다.
7. 히틀러보다 처칠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했다. 처칠은 '운명의 여신은 관습에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분노한다'고 쓴 적도 있다. 처칠은 히틀러를 유럽 문명의 파괴자로 보았고 자신을 수호자로 보았다.
8. 처칠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교묘하게 융합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독일인 특유의 관념론에 기울었다. 히틀러는 독일군대가 강력한 이유로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독일 병사들의 정신력을 들었다. 히틀러가 관념론자라면 처칠은 원칙론자였다.

존 루카스의 책 '히틀러와 처칠의 격투'에서 著者는 정치가가 혁명가에게 이겼다고 썼다. 그는 히틀러야말로 레닌, 스탈린, 뭇솔리니를 능가하는 20세기 최고의 혁명가였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국가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면 엄청난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는 점에서 혁명가이다. 그는 마르크시즘의 유물론적 정치철학의 결점을 간파했다.

히틀러는 계급보다는 國籍이, 국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가 힘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되 국가주의를 우선시켰다. 국가를 신비화하고 그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미화하여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조직한 힘이 얼마나 가공스러운가는 2차 세계대전 때 실증되었다. 영국, 소련, 미국 등 세계 문명국이 힘을 합쳐 死活을 걸어서 겨우 독일을 붕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집권하면 산업을 국유화할 것이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국유화를 해야지? 나는 국민들을 국유화할 것인데'
국민들을 광신적인 애국심으로 홀려놓으면 그 국민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국가소유가 되고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히틀러는 그러나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내외의 敵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애국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자 루카스는 처칠이 히틀러에게 승리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저작가가 연설가에게, 세계주의자가 인종주의자에게, 민주주의의 귀족이 인민주의의 선동가에게, 전통주의자가 급진주의자에게, 애국자가 국가주의자에게 승리했다. 이 전쟁은 수백만명에게는 큰 재앙이었으나 그 결과 세계는 그 이상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제자 김정일, 그 김정일의 남한내 앞잡이들에게 이길 사람도 애국자, 전통주의자, 세계주의자, 민주주의의 엘리트, 그리고 저작가가 아닐까.

출처 :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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