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정의 프레임’ 재조명을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0-09-17 15: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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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박근종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사면 복권된 이후 YWCA 연설에서 남긴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청와대 회의를 주재하는 문 대통령 뒤편 벽에는 ‘나라답게 정의롭게’라는 슬로건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정의’는 시대적 화두이자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조류이다.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란 공리(公利)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共同善)을 고민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異見)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도덕적 이견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탄탄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켄터키대학교 심리학교수 ‘리처드 H 스미스(Richard H. Smith)’는 "쌤통의 심리학"에서 야영을 하던 두 사람이 숲속을 걷다가 커다란 곰을 만났는데 둘 중 한 명이 갑자기 등산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다른 한 명이 그런다고 곰보다 빨리 뛸 수 있을 것 같으냐고 야유하자, 그 친구가 말했다. “곰은 이길 필요 없어. 너만 이기면 돼!”제아무리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인간은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든다. 내 옆의 경쟁자보다 잘하는 게 정답인 셈이다. 뉴요커(The New Yorker)인 한 만화가는 이런 심리를 “내가 일등석을 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내 친구들이 이등석을 타야지!”라고 표현했다. 이런 비교에 따른 우울함을 줄이는 거의 유일한 길은 사람들이 사회가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과 평가기준의 평등을 말한다. 노력과 능력에 대한 평등까지를 함축하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결과의 보상이 무조건 평등하다면 발전과 혁신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은 2018. 4. 9. <뉴스민> 칼럼에서 공정성(公正性, fairness)을 각자의 신장보다 높은 울타리 너머로 야구경기를 보고 싶어 하는 세 꼬마의 예로 ‘불공정성’, ‘형식적 공정성’, ‘실질적 공정성’의 세 층위로 구분한다. 먼저 불공정성은 오직 한 명에게만 올라설 받침대를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주지 않는 경우로 “특혜”라는 비난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다. 이런 게 바로 노골적 불공정이다. 다음으로 형식적 공정성은 세 꼬마 모두에 똑같은 높이의 받침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기회의 형식적 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 ‘실질적 공정성’은 세 꼬마들의 신장이 각기 다른 경우 울타리 너머 야구경기를 본다는 목적에 맞춰 신장에 맞는 높이의 받침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흔히 언급되는 “공정성”이나 “공정한 경쟁”은 ‘형식적 공정성’에 가깝다. 그러나 한국리서치가 <여론 속의 여론>에서 2018. 2. 2. 발표한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는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에 달한다. 차등 분배를 선호하는 응답은 전 계층 및 사회집단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능력주의를 공정성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돈 많은 부모, 뛰어난 지능, 탁월한 신체능력,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 같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관계없는 요소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능은 개인의 성공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교수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에서 “천부적 자질의 배분에서 생겨나는 각자의 위치에 대해 응분의 자격을 갖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다시 말해 재능이 불평등하게 나뉘어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생겨나는 상황은 결코 당연하거나 정의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신장이 크든 작든, 야구를 보고 싶은 모든 꼬마들이 즐겁게 야구를 볼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형식적 공정성을 넘어 실질적 공정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서강대학교 전상현 교수가 <세대게임>에서 인용한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파울 바츨라빅(Paul Watzlawick)’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취객과 경관’우화처럼 “한 경관이 밤에 순찰하다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열쇠를 찾는 중입니다. 도와주세요.” 경관은 취객과 함께 꽤 오랜 시간을 열쇠를 찾아 모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물었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취객이 답했다. “아니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저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안 보이면 못 찾잖아요.”라고 답했다. ‘선의’를 가지고 돕던 경관은 취객의 ‘지휘’아래 헛된 일만 한다. 혹시 우리도 ‘정의 프레임’의 강렬한 불빛에 현혹되어 엉뚱한 곳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바로미터의 공정성이 흔들린다면, 비교당한 사람들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최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위치가 공정한 평가에 의거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에 시달린다. 오이 조각을 받고 좋아하던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가 받은 포도알을 보고 화를 내는 건 공정함이 단지 인간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공정성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자신만의 관점과 시각으로 스스로가 만들어낸‘정의 프레임’에 갇혀 취객의 가로등처럼 내면의 ‘정의 프레임’이 엉뚱한 곳을 비추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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