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면 제76주년 광복절이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기 위해서 1949년 10월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광복절이 국경일로 제정됐다.
이날은 경축행사를 전국적으로 거행하는데 중앙경축식을 서울에서, 지방경축행사는 각 시·도 단위별로 거행한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광복절 행사는 대부분 취소되거나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하여 치러질 예정이다.
아쉽게도 우리고장 부산에서도 부산시청 대강당에서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가 취소됐다.
그렇지만 행사는 취소되더라도 이날의 의의를 고양하고자 전국의 모든 가정은 국기를 달아 광복의 의미를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휴일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내와 집근처 백양산 둘레길을 자주 찾는다.
가는 길에 성지곡수원지를 지나가는데 수변 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박재혁 의사 동상 앞에서 가끔 옷깃을 여미곤 한다.
여기서 잠깐 박재혁 의사를 소개하면 박의사께서는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1895년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해 부산진육영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와 왜관의 무역학교에 다니다가 1917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다니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이때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고, 1920년 7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창단된 무장 항일 독립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고, 상하이에서 단장 김원봉(金元鳳)선생을 만나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할 것을 지시 받았다.
같은해 9월13일 고(古)서적상으로 가장해, 고서(古書)속에 폭탄을 숨겨가지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고향인 부산으로 잠입했다.
1920년 9월14일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가 폭탄을 던져 그 자리에서 폭사시켰는데, 이때 박재혁 의사도 포탄 투척 후 파편으로 중상을 입었다.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일본의 손에 죽기 싫다면서 단식을 시작하여 결국 27세의 나이로 스스로 순국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현재 박재혁 의사 동상은2003년 6월13일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부산광역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 35년동안 엄청난 경제적 수탈을 당하였고, 백성들은 단발령과 우리말과 글도 사용하지 못하는 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고장 부산은 일본제국주의의 전진기지로 인해 더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지금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겪고 있고 위안부 할머니분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일본정부로부터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광복의 영광을 되찾아 지금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한 것은 박재혁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진정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오는 15일 광복절에 자녀들의 손을 잡고 성지곡수원지 수변공원에 위치한 박재혁 의사 동상에서 다시 한 번 광복의 의미를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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