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의 힘으로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5-05-17 19: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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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비평가 {ILINK:1}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방울이 커다랗고 단단한 바윗돌을 뚫어내듯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깁니다.”

시인 고진하 씨의 산문집 ‘부드러움의 힘’의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이 말은 중국의 사상가 노자의 것이다. ‘상선약수’라는 말도 있거니와, 물처럼 부드럽게 사는 일이 사실은 드높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거기에는 담겨 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자연이나, 인간사란 말 그대로 인공인 것이다.

흐르는 물을 가두어 댐을 만들고, 바윗돌을 뚫어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나, 그 거스름을 통해서야 문명과 문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노자의 근원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를 존중하지만, 동시에 자연의 비유를 얼마간 거슬러서야 가능해졌던 문화와 문명 또한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명화가 자연의 질서와 리듬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위협하고, 그 대가가 고스란히 인간에게 귀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연의 본질은 사실 야생(野生)인 것이다. 그 표면적인 조화 안에 숨어있는 복마전의 투쟁과 갈등을 우리는 간과하기 싶지만, 문명사회 이전에도 인간은 이유 없이 자연의 희생양이 되곤 했던 것이다.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종교나 이보다는 더욱 체계적인 관념으로 무장되어 있는 현대의 종교들이 최초로 두려워했던 것은 이 야생의 자연이었다.

유사 이래로 폭력은 너무나 흔한 것이었다. 지구상에 직립했던 최초의 인간들에게도 폭력은 자연은 물론 인간 구성원 사이에서도 너무나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관리하고 승화하는 문제는 매우 골치 아픈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상호의존’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동시에 인간들은 ‘자기만의 방’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별성’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회는 공동체의 안녕은 물론 개인의 개별성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규칙들을 계발했을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비상사태를 제외하고는, 물리적인 폭력을 사적으로 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처벌한다는 규칙, 곧 법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런 기원에 대한 상상에서 시선을 현실로 돌려보면, 어떻게 된 게 여전히 이 세속도시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담장을 뛰어넘어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심야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는 술 취한 가장의 패대기질에 무방비로 노출된 힘없는 부녀자들의 겁에 질린 구조신호다.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중등학교의 화장실 뒤편에서는 오늘도 교복을 짧게 줄여 입은 학생들이 겁 많고 힘없는 동료학생들의 ‘쪼인트’를 까고 있다.

군에 입대한 똑똑한 장정들이 훈련소에서 똥물을 강제로 먹었다는 엽기적인 뉴스가 들려오고, 20대의 어처구니없던 내 현역시절처럼 요즘의 군인들도 ‘빠졌다는’ 이유로, 내무반에 ‘집합’ 당해 빤질빤질한 ‘일개장 워커’로 허벅지를 가격당하고, 원산폭격 상태로 ‘앞으로 전진, 뒤로 후진’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속된 말로 ‘쌍팔 년도’ 군대도 아닌 방송국에서, 그것도 유쾌한 웃음으로 엔돌핀을 제공했던 한 개그맨이, 후배 개그맨들을 ‘집합’시켜, 함께 웃고 떠든 것이 아니라, ‘원산폭격’을 시키고, 몽둥이로 가격하고, 일장훈시를 늘어놓았다는 이 풍경은, 도대체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부조리극처럼 느껴져 씁쓸하고 충격적이다.

무엇이 이런 폭력의 작동을 지속시키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인에 대해 다채로운 진단을 내리고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의 현대사에까지 관철되었던 군사-파시즘 문화의 행동방식이고, 거기에 현대적인 가속도의 사회에서 디지털화된 언어로 몸을 바꾼 ‘경쟁 이데올로기’와 그 결과인 ‘승자독식 구조’의 전면화라는 문제도 제시된다. 다 그럴 듯하고, 모두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해법이 많은 경우 극단적인 ‘폭력근절’ 캠페인 또는 ‘폭력소탕’ 작전 식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인 나는 폭력의 완전한 ‘근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21세기라는 ‘위험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모두 노자 식의 평정을 획득하는 것 역시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폭력의 완전한 근절을 몽상적으로 외치기보다는,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관점을 세우고, 이를 정책에 반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이고 ‘문화적 가치지향’이다. 적어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유연하고 다원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의식이나 문화적 가치지향의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뒷덜미를 잡혀 있다.

어쩌면 정치적 민주화와 다원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투해왔던 과정보다, 문화적 민주화와 다원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더욱 장구하고 고단한 과정일 수 있다. 정치는 의식적 지향과 실천의 문제에 집중하지만, 대체로 문화는 의식은 물론 무의식의 차원에서의 ‘승화’까지를 포괄하는 매우 힘겨운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것이 이 세속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일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부드러움의 힘이라는 것을 자주 상상하게 하는 ‘감성교육’에 인내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꾸 상상하다 보면, 몽상도 현실이 된다.
사람은 꿈꾼 만큼 살 수 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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