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7일 페이스북을 통해 “며칠 전에 건강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돼 정말 죄송하다”고 밝힌 지 68일만이다.
그는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며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 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과도한 양극화, 위화감과 패배 의식,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온갖 사건 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온다”며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 정치가 횡행해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는 나라 걱정에 마음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물극즉반(物極則反ㆍ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온다)의 세상 이치처럼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길 기대할 뿐”이라고 말했다.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후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접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대학생 친구'로 알려졌던 그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유신 독재 반대 시위,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수배와 도피를 반복했고 10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기도 됐다.
김영삼 정부 당시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법이 제정됐지만 “누구나 자기 영역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데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보상금을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1989년 민중당을 시작으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한 그는 이후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으나 제도권 정치진입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ㆍ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선거, 이어 17ㆍ19ㆍ21대까지 총 7차례 선거에서 낙선했고,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세 차례에 걸친 대통령 선거 출마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가 ‘영원한 재야’ 별칭을 얻게 된 배경이다.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해 저술 활동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했던 그는 최근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열정을 쏟았다.
지난 총선 이후 석달을 밤새워 집필한 ‘위기의 한국-추락이냐 도약이냐’를 통해 “비전도 전략도 없이 오직 집권욕에만 사로잡힌 여야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뤄 나라와 민생을 거덜내고 있다”며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씨와 딸 2명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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