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 부산에서는 무슨 일이?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4-02-28 13: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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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보훈청 복지과장 이성철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내 어릴적 모교 초등학교 교정에서 해마다 3월1일이 되면 목청껏 불렀던 삼일절 노래가사의 앞부분이다. 비록 철없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자주독립한 대한민국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웠기에 그 소년에겐 다소 비장함까지 가슴속 깊이 솟구쳤을 것이 분명하다.그 시절 따뜻한 봄날에!

“人心朝夕變 山色古今同”(안중근 의사 어록中에서,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데, 산색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음’으로 해석),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대도시로 올라왔고 낼 모레가 되면 또다시 삼일절을 맞이한다. 그렇게 봄은 어김없이 내게로 찾아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일제 강점기 매섭고 혹독한 세월을 보냈지만 끝내 우리는 광복이라는 봄을 맞이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봄은 변함없이 다가오지만 분명 그저 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부산에서도 지금의 따스한 봄을 있게 한 삼월의 주요한 독립운동사들이 있어 한두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과거 부산은 1876년 개항과 함께 초량에 왜관이 설치·운영되면서 부산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이 자리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조선 최초의 근대 개항장이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침략의 발판이기도 했던 이곳 부산은 일본인들의 통제와 탄압이 타 지역보다 더 심했다.

오래전 임진왜란을 통해 표출된 우리민족의 항일정신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부산지역에서도 기미년 3.1운동으로 계승·표출됐으며, 1920년대의 청년운동과 노동쟁의, 1930년대의 항일학생운동 등으로 전개된다.

특히 기미년 그해 3월 우리 부산지역에는 일신여학교와 구포장터 만세운동이 대표적인 3.1만세운동으로 손꼽힌다.

먼저 1919년 3월11일 일어난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지역 3.1 운동의 효시로 평가받는데, 서울에서의 3.1 운동은 당시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해 부산에서는 3월10일 아침 조선인 거주지인 초량, 부산진 등지에서 밤사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격문이 잇따라 발견돼 경찰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일본 경찰들은 이튿날인 3월11일 거사가 예정됐던 부산상업학교의 시험을 돌연 중지시키고 학생들을 귀가시키며 시위 발생을 원천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부산지역 최초 근대 여성 교육시설이기도 한 일신여학교는 현재 '동래여고'의 전신으로,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 학생 김반수와 심순의 등 11명이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오면서 만세운동에 불을 붙였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다음 날인 3월12일 체포돼 부산구치소로 옮겨졌는데 심문과정에 이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고 나체로 신체검사를 받는 등 모진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부산에서는 동래봉기(3월13일), 범어사 학생의거(3월19일), 구포시장의거(3월29일)가 잇따르는 등 가히 3.1운동의 불씨를 제대로 지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1919년 3월29일 구포장터를 중심으로 불타오른 독립만세운동인 '구포장터 만세운동'은 부산 구포지역 유지와 노동자, 농민, 상인 등을 중심으로 구포장날에 일어났다. 타 지역 만세운동이 학생들 중심이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특정 계층에 국한했던 만세운동이 부산사람 모두에게 들불처럼 번진 정점이었다. 당시 구포시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번화가로써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인근 경남과 울산 등지에서 수천명 인파가 몰렸다.

1919년 3월 중순 경성의대에 다니던 24세 양봉근은 부산으로 내려와 자신보다 5살 많은 구포면 서기 임봉래를 찾아간다. 이미 천안과 서울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구포와 인접한 동래에서도 일신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두 사람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드디어 장날인 3월29일 정오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다른 청년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눴고, 장꾼 1000여명까지 합세해 순식간에 만세 함성이 장터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만세운동을 위해 시장 상인들은 문을 닫고 장꾼들을 지휘했다. 한참 후 일본 경찰은 독립선언서를 뿌리던 주동자 11명을 곧바로 주재소(現 구포1치안센터)로 연행했고, 이 소식을 들은 구포시장 상인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거센 저항을 했다. 이에 주재소 근무중인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만세시위 중이던 군중에서도 일본 군경으로부터 총탄을 맞아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전문을 보시다시피 자그마치 105년의 세월을 보낸 지금 우리는 기미년 그해 삼월 소리높여 외쳤던 항일 저항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지 내 자신에게도 자문(自問)한다.

올해 또다시 찾아온 봄, 기미년 3월의 봄처럼 올해 제105주년 3.1절에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빠짐없이 달아 순국선열들의 그 숭고한 넋을 맘껏 기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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