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독립운동 소개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7-28 19: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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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독립운동사’ 이윤식 편저/ 민미디어 刊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

1920년 노백린과 곽임대는 미국에서 적은 인원으로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모색하던 중 비행사 양성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비행학교 설립계획을 세운다. 대농장주 김종린의 도움을 받아 농장 일부에 비행장과 활주로를 만들고 연습기로 구입한 3대의 비행기에 태극마크를 단다. 당시 훈련생들은 도쿄폭격의 강한 의욕을 가졌다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이윤식 편저. 민미디어 刊)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가운데 공백으로 남아있던 ‘항공독립운동사’에 주목, 일제강점기 ‘하늘의 독립’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자 했던 한인 젊은이들의 행적을 추적했다.

제목은 도산 안창호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 안창호의 일기에는 임시정부 차원에서 비행기를 구입, 독립운동에 사용할 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계획은 좌절된다. 그러나 대안으로 중국의 비행학교에 한인들을 파견, 교육시키고자 했다. 특히 미국에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중국군 소속의 한인 조종사를 배출하는 결실을 따냈다.

안창호가 독립군간의 긴밀한 연락 등 정보소통의 수단으로 비행기를 염두한 반면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인 노백린은 전투수단으로의 비행기를 구상했다. 공군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 장래 전쟁의 승패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는게 그의 생각이었고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는 그 가시적 산물.

중국 공군은 한인조종사들의 날개가 돼주었다. 중국의 군벌들은 자신들의 휘하에 항공대를 설립할 목적으로 비행학교를 설립, 비행술을 가르쳤다. 황포군관학교의 경우, 한인학생이 3기 때 3명, 4기 때 24명, 5기 때 6명이 입교했다. 한인특별반도 마련됐다. 권기옥과 이영무, 장지일 등은 운남비행학교에서, 이병운과 김공집, 유철선, 차정신 등은 광동비행학교에서, 김은제는 중앙항공학교에서 각각 비행교육을 받았다.

특히 비행사 전상국과 김은제는 1938년 일본과 중국간 공중전에서 중국측 비행사로 참전, 중국의 항구를 사수하는 교전에서 싸운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 비행학교를 나왔으며 비행사고로 사망한 김공집 조종사는 27비밀결사대원으로 중국 봉천에서 폭탄을 제조했으며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1924년 상해 임시정부가 비행대 창설을 시도하자 모스크바 비행학교로 파견간 뒤 교관으로 근무했다.

한국항공사를 얘기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최초로 고국 방문비행을 한 안창남. 조종사이면서 훗날 항공사를 설립한 신용인, 중국에서 공군으로 활약한 여성 전투기 조종사 권기옥, 일본 비행대회에서 상위입상한 박경원 등도 항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는 미국 레드우드비행학교 졸업생들로 윌로스비행학교 교관이 된 한장호, 이용선, 이 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 등이다. 편저자는 “비행기를 매개로 한 선인들의 독립운동과정과 애국심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277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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