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16 1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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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0) 불을 뿜는 海女示威

그날 비상대책회의는 장시간에 걸쳐 난상토론(爛商討論)을 벌인 끝에 당국에 대한 3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의하고 일단 막을 내렸다.

학생들과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다음, 교실안에는 고정관, 조용석, 서병천, 이만성등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만 남았다. 그들은 곧 간부회의를 열었다. 3개항의 요구조건에 대해 두번 세번 검토하고 또 검토를 했다. 그것은 꼼꼼하고 빈틈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만성의 간곡한 요청을, 모든 간부들이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재검토 요청과 곁들여서 이만성이 간부들에게 경종을 울려준 대목은 주목에 값할만한 것이었다.

“좀 더 두고봐야 알게 될 것입니다만,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혼미한 해방정국에 경이로운 지각(地殼)변동을 일으키고도 남을, 선전포고를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계신 고정관선배님을 위시해서 조용석, 서변천 그 밖의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 앞에서 외람되게 제가 나서서 의견을 말씀드린다는 것이 여간 부끄럽고 송구스런게 아닙니다.

그러나 후환을 막기 위해서는,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무슨 얘기냐고 하면 이번 두 여학생의 죽음은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비극적인 사건으로서 양떼 같은 이 고장 주민들을 성난 호랑이로 만들어 버린,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대 참사라고 하겠습니다.

아마 어제쯤 ‘건준’의 김대호선생께서 상경했을테니까 그 분이 돌아와봐야 알겠지만, 우리 관광면 면장으로 임면된 이종상(李鍾祥) 그 사람에 대한 추방운동은, 면민 모두가 치러야할 초미의 당면과제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왜 이말을 꺼냈느냐고 하면, 이번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사태는 면장타도에 앞서 우리들의 능력을 가늠해보는 전초전(前哨戰)성격을 띠었지 때문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선배님들! 최상균은 일본인 도사(島司) 밑에서 2인자의 자리를 누렸었고, 최상수는 한낱 면서기로서 부면장 행세를 해온 그런 인간이 아닙니까? 그러나 말이 제2인자였지, 그들은 30만 제주도민위에 군림해온 거물급 민족반역자였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기에망정이지 만약 지금도 일제시대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맨주먹으로 바윗돌을 치는 격이 아니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왕 칼을 뽑아들었으니만큼 천벌받아 마땅한 역사의 죄인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온 악당들의 모가지를 쳐서, 뎅겅 땅에 굴러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힘과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선배님들의 격려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만성은 청산유수 물 흐르듯 긴말을 푸짐하게 늘어놓았다. 모든 간부들, 고정관과 조용석도 웅변의 일인자 답지 않게 매우 겸허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동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나도 거기까지 미처 생각을 못했었는데, 면장타도를 위한 전초전이라…. 진짜 이만성동지의 말은 앞날을 꿰뚫어보는 명언이라구 명언! 이만성동지의 말대로 우리는 이번 사태를 슬기롭고 강력하게 풀어나갈 것 같으면 면장타도는 식은죽 먹기와 다를 것 없다고 봐요.

따라서 지금 우리는 명장타도, 아니 그이상의 차원높은 전초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얘기가 되겠지요. 명예와 자존심을 건 투쟁인만큼, 승리를 위해 어떤 희생도 달게 받겠다는 투쟁정신을 가다듬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아직 낙관은 금물이지만,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굳게 다짐을 해야겠지요,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고인이 된 두 여학생의 영전에 애도의 뜻을 표하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조위와 곁들여서 격려해드리고 이 자리로 돌아오도록 했으면 좋을 것 같소만…”

모든 간부들은 고정관의 제안에 동의했다. 곧 그들은 상가를 다녀왔고, 부랴부랴 진성서 작성을 서둘렀다. 먼저 진정서에 담을 내용을 난상토론 끝에 정하고, 집필은 이만성에게 일임했다. 이만성은 인사치례로 사양하다 기꺼이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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