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 이하 모든 간부들이 군침 흘리며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만성은 미리 준비한 양면괘지를 꺼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의 만년필을 뽑아 꼬나 잡기 바쁘게 일필휘지 신나게 써내려 갔다. 한 시간 남짓 걸린 끝에 진정서는 완성이 되었는데, 고스란히 여기에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서
-존경하는 제주도 미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과 법무관 태드리치 대위님!
우리 진정인 일동은 이국만이 머나먼 미국 땅 에서 낯선 제주 땅을 찾아와 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당신들이 여장을 풀기 바쁘게 값진 선물 대신 씁쓸한 진정서를 불쑥 내밀게 된 우리 진정인 들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당부코자 합니다.
오죽이나 다급하고 오죽이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수인사도 치르기 전에 날벼락 같은 진정서를 띄워야 했겠습니까? 지금은 싸움하는 비상시국이 아니고, 이 땅 또한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다 알고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일이, 그리고 10만 일본군이 제주땅을 뒤덮었을 때에도 벌어지지 않았던 눈물겨운 대 참사가, 태평가를 부르며 마냥 평화로워야 할 우리고장을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주경야독하며 새 시대의 꿈을 키워가던 2명의 여학생이 악당들에게 몸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전무후무한 참극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내막을 모르고 있는 몰지각한 사람 중에는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걸 문제삼고 법석을 떨 필요 없지 않겠느냐 하고 오히려 악당 쪽을 두둔할 수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쪽 사정을 아는 정상인으로서는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흔들어 버리겠지요? 그래서 이 진정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위해서도 우리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희대의 비극적 사태를 해결해 주십사 하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의 사태는 우리의 앞날을 크게 위협하는 불길하고 불행한 참사라는 점에서 우려와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그 정도의 사건을 침소봉대 격으로, 지나치게 왜 확대하느냐고 지탄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지탄하는 심리를 탓할 만큼 옹졸한 우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진정인 일동은 이 대목만은 추호도 숨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를 들 수 없는 낯뜨거운 장면을 싫어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두 여학생의 몸을 빼앗고 목숨까지 잃게 한 장본인들은 낯선 이방인도 아닌, 바로 이 고장의 내로라 큰소리쳐온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네서 조용히 해결하면 될 일이지, 밖으로 들고 나갈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반박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숲만 보고 나무를 못 본 사람의 경망한 언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치한들은, 8·15 해방 전까지 하나는 도사(島司) 다음의 제2인자였고, 또 하나는 관광면 사무소의 제2인자로서 그들 형제는 30민 도민 위에 군림해온, 악랄한 일제 앞잡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자들은 일제가 물러가고 미군정 청이 들어선 마당에, 화냥년 꼬리 치듯 꼬리만 잘치면 부귀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제 버릇 개 못 주고 햇병아리 집어삼키는 이 땅 제1의 우두머리 치한으로서의 관록을 자랑했다고 볼 때, 미군정 당국이 그 자들을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도록 단호한 조치를 취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냥 방임할 경우 제2 제3의 끔찍한 참사가 꼬리 물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장 최상균, 최상수 형제를 체포해서 극형에 처하도록, 손을 써주는 것만이 30만 제주도민을 위해서 제1차 적으로 완수해야 옳을 다급한 과제라고 믿습니다. 큰 둑도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제치한'에 대한 처벌문제를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신과 죄악을 밥먹듯 일삼아온 문제의 악당들을 체포해서 단죄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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