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17 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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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불을 뿜는 海女示威

고정관 이하 모든 간부들이 군침 흘리며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만성은 미리 준비한 양면괘지를 꺼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의 만년필을 뽑아 꼬나 잡기 바쁘게 일필휘지 신나게 써내려 갔다. 한 시간 남짓 걸린 끝에 진정서는 완성이 되었는데, 고스란히 여기에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서

-존경하는 제주도 미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과 법무관 태드리치 대위님!

우리 진정인 일동은 이국만이 머나먼 미국 땅 에서 낯선 제주 땅을 찾아와 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당신들이 여장을 풀기 바쁘게 값진 선물 대신 씁쓸한 진정서를 불쑥 내밀게 된 우리 진정인 들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당부코자 합니다.

오죽이나 다급하고 오죽이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수인사도 치르기 전에 날벼락 같은 진정서를 띄워야 했겠습니까? 지금은 싸움하는 비상시국이 아니고, 이 땅 또한 전쟁터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다 알고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일이, 그리고 10만 일본군이 제주땅을 뒤덮었을 때에도 벌어지지 않았던 눈물겨운 대 참사가, 태평가를 부르며 마냥 평화로워야 할 우리고장을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주경야독하며 새 시대의 꿈을 키워가던 2명의 여학생이 악당들에게 몸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전무후무한 참극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내막을 모르고 있는 몰지각한 사람 중에는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걸 문제삼고 법석을 떨 필요 없지 않겠느냐 하고 오히려 악당 쪽을 두둔할 수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쪽 사정을 아는 정상인으로서는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흔들어 버리겠지요? 그래서 이 진정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위해서도 우리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희대의 비극적 사태를 해결해 주십사 하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의 사태는 우리의 앞날을 크게 위협하는 불길하고 불행한 참사라는 점에서 우려와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그 정도의 사건을 침소봉대 격으로, 지나치게 왜 확대하느냐고 지탄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지탄하는 심리를 탓할 만큼 옹졸한 우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진정인 일동은 이 대목만은 추호도 숨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개를 들 수 없는 낯뜨거운 장면을 싫어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두 여학생의 몸을 빼앗고 목숨까지 잃게 한 장본인들은 낯선 이방인도 아닌, 바로 이 고장의 내로라 큰소리쳐온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네서 조용히 해결하면 될 일이지, 밖으로 들고 나갈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반박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숲만 보고 나무를 못 본 사람의 경망한 언동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치한들은, 8·15 해방 전까지 하나는 도사(島司) 다음의 제2인자였고, 또 하나는 관광면 사무소의 제2인자로서 그들 형제는 30민 도민 위에 군림해온, 악랄한 일제 앞잡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자들은 일제가 물러가고 미군정 청이 들어선 마당에, 화냥년 꼬리 치듯 꼬리만 잘치면 부귀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제 버릇 개 못 주고 햇병아리 집어삼키는 이 땅 제1의 우두머리 치한으로서의 관록을 자랑했다고 볼 때, 미군정 당국이 그 자들을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도록 단호한 조치를 취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냥 방임할 경우 제2 제3의 끔찍한 참사가 꼬리 물고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장 최상균, 최상수 형제를 체포해서 극형에 처하도록, 손을 써주는 것만이 30만 제주도민을 위해서 제1차 적으로 완수해야 옳을 다급한 과제라고 믿습니다. 큰 둑도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제치한'에 대한 처벌문제를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배신과 죄악을 밥먹듯 일삼아온 문제의 악당들을 체포해서 단죄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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