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18 18: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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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2) 불을 뿜는 海女示威
존경하는 스타우드 소령 그리고 패드리치 대위! 우리네 속담에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일이 일어났을 때 작은 도구를 써서 즉각 처리를 해야 안전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미루었다가는, 가래와 같은 큰 도구를 써도 뒷감당이 안 돼 갖고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변죽울림의 소리인 셈이지요. 요컨대 이번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강간살인 사건’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작은 사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 보다 더 큰 사건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해서 별 것도 아닌데! 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을 경우 더 큰 사건들도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본보기가 되도록, 범인을 붙잡아 천둥번개 못지 않게 철퇴를 내리 쳐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국이 맘만 먹는다면 눈 깜짝 할 사이 해치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진정인 일동은 군정당국의 성의 있는 노력을 엄숙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당신들은 사명감을 갖고 제주땅에 주둔하게 된 만큼 이곳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려운 데 긁어주고 아픈 데 쓰다듬어 준다는 건 어렵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사건 만큼은 엄히 다스리는 단호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이번 우리 고장의 사건은 조그마한 지역의 사건임과 동시에 제주도 전체와 관련된 대 사건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군정당국은 그래서 무엇보다도 제주도내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 작은 사건을 해결하려면 먼저 제주도는 어떤 곳인가 하는 대목부터 익히고 터득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주도는 분명 섬입니다. 천지가 개벽되고 부터 몇 천년동안 임금 아닌 성주(星主)가 다스려온 그것이 제주도의 전신(前身)이기 때문이지요. 큰 대륙과 동떨어진 ‘작은 대륙’ 탐라국(耽羅國)의 ‘성주’는 여느 독립국의 제왕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러 통치하는 게 아니라 ‘평등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공존공영(共存共榮)해 왔던 것입니다.

법치주의체제가 자리잡기이전이었지만 탐라국은 이미 민주공화국 형태의 체제를 유지해온 셈이었지요.

몽골, 고려, 조선, 일본 등의 지배아래 체제가 와해되고 옛 흔적이 움도 싹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그렇지, 안 그랬더라면 제주땅은 몇 백년 전에 이미 지금으로부터 1백년 후에 이루어질 눈부신 발전과 번영을 앞당겼을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아쉬워하고 하지요.

제주도는 육지부와도 다른 점이 많아요.

조선초기부터 반정부인사들을 귀양보내던 외진 땅, 민주주의 부르짖은 반정부 인사들의 감옥이자 수용소로 전락했던 이곳 제주땅엔 그들 후예들의 한과 슬픔과 분노의 응어리가 보이지 않는, 제2의 한라산 기상을 쌓아온 셈이었다고 할까요?

도둑, 대문, 거지 없는 소위 3무(三無)의 땅이 까닭 없이 자리를 굳힌 게 아니었지요.

부자도 가난도 없고, 대지주도 소작농도 없으며, 모든 사람들의 생활자체가 수평을 유지해온 곳이 제주도라고 봅니다. 게다가 고대로 남녀평등은 지나칠 정도여서, 경제권을 쥐고 있는 여성쪽으로부터의 이혼율이 높았던 것도 특색의 하나로 꼽혀온 셈이었구요.

뿐만 아니라 제주인의 됨됨이를 논한다면 선비형의 얼굴에 온순, 정직, 근면, 성실, 정의감을 내세울 수 있겠지요. 대체로 강자 앞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질,

그것을 ‘탐라혼’이라고 일컬어 왔어요. 예부터 맥을 이어온 민란(民亂)도 거기에 바탕을 두었었구...바라옵건데 미군정 당국은 몇 백년동안 강대국의 지배아래 시달려온 제주도와 제주인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 주실 것을 당부코자합니다.

끝으로 진정인 일동은 만에 하나 우리의 뜻이 묵살되었을 경우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 거이냐는 점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1945년 10월 25일 진정인 일동

진정서는 마무리되었고, 곧 간부들 한 사람씩 차례차례 돌려읽기 절차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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