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역사대하소설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20 18: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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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불을 뿜는 海女示威 고정관을 선두로 간부들은 진정서를 릴레이식으로 한번씩 윤독(輪讀)을 했다. 모두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고정관과 조용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 대해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탓인지는 모르지만, 다분히 두 사람의 느낌에는 차이가 있음을 이만성은 짚을 수 있었다. 영락없이 맛있는 생선을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실낱같은 가시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그런 얼굴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독후감들을 좀 말씀해 주시지요. 저의 주관과 선배님들의 주관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수정할 대목은 이 자리에서 수정해야겠어요. 더욱이 인종, 언어, 감정, 풍속, 생활... 모든 것들이 우리네와 딴판인, 그리고 신분이 군인인 그들을 상대로 한 진정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눌 수 없어서 즉흥적으로 편리하게 써 내려갔거든요. 삭제하거나 첨가할 부분이 있으면 기탄 없이 지적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이만성은 자신감을 갖고 딴은 젖먹은 힘까지 쏟아 휘갈겨 글인 만큼, 허점을 집어낼 사람은 없으리란 사실을 충분히 내다보며 건성으로 던져본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했었는데,“이 정도의 문장력이라면 경성 한복판에 내놔도 흠잡을 사람 없을 것 같은데요. 더욱이 우리 제주도민들이 하고싶은 말을 속 시원히 표현한 것 아니겠어요? 모두다 감탄하고 있는 판에 더 이상 무엇을...? 혹시 고정관 선배님은 나름대로 보완했으면 싶은 구절이라도...?”

김순익이 주책없이 호들갑을 떨다 무안함을 느끼며 머쓱하니 말꼬리를 사렸다. 사실 그는 제멋대로 대변자임을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도 고정관의 얼굴에서 묘한 것을 느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고정관의 의표를 슬쩍 찔러 본 셈이었다. 순간, 모든 시선들이 고정관과 조용석의 얼굴위로 번갈아 쏠리고 있었다. 이 때 고정관은 당혹감을 감출 길이 없어 얼굴이 불그무레해지며, 불에 덴 것처럼 다급하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왜들이래. 보완을 하다니 무슨 소리야? 더 붙일 것도 떼어버릴 것도 없어. 너무너무 완벽한 게 탈이라니까. 미국 돈으로 백만 불 짜리 글일세. 우리는 이만성 동지 같은 훌륭한 후배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매우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여길 뿐이란 말야.”

“물론 반응은 궁금한 게 사실이지. 우리는 좋은 결실을 바라지만 때에 따라서는 1백 80도로반전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해.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1등국 이라는 우월감에다 개선장국이라는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제주도는 먼 옛날부터 법치주의 이전의 민주공화국이었다는 대목이라든가 3무의 땅이라든가 소작농도 없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는 대목이라든가,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잇는 독특한 ‘작은 대륙’ 이라는 대목 등등, 그네들에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예민한 표현이라서 악의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싶기도 해. 겉으로는 진정서로 되어있어도 내용은 비관적인 성명서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해서, 과잉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미리 계산에 넣어둬야 한다고, 나는 여러 동지들에게 얘기해 두고 싶을 뿐이요.”

고정관은 웅변의 일인자답게 목소리만 우렁찬 게 아니라 가슴속도 저 태평양보다 깊고 넓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같아서, 간부들은 크게 감동하여 뜨겁게 손뼉들을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기쁘고 흐뭇해하는 사람은 이만성이었다. 과연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아온 우리의 명문 ‘영재의숙’ 출신의 대 선배였구나!

‘신 자본론’을 결부시킨 나머지, 진정서 내용에 불만을 품었지 않았을까 싶어 맘에 걸렸더랬는데 기우로 그쳤으니, 그 보다 더 다행할 수가 있겠냐 싶어서 이만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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