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22 21: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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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4) 불을 뿜는 海女示威

진정서에 서명날인(署名捺印)한 사람의 수효는 약 200 명. 진정서가 작성된 이튿날이자 사건발생 3일째 되던 날 아침나절까지 서명날인자들은 줄을 이었다. 참여희망자는 아직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고정관, 이만성 등 간부들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되어 오전 중으로 일단 마무리지었다.

고정관, 조용석, 김순익 등 세 사람은 그 날 오후 진정서를 갖고 제주 성내로 내달렸다. 그런데, 그들이 제주성내로 떠나자마자 기상천외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난데없는 꽃상여를 앞세운 군중들이 천외동 최상균의 집을 덮쳤다. 겉으로 보기엔 공동묘지로 가는 운구 행렬 같았지만, 사실은 가해자를 규탄하고 응징하기 위해 사체를 담보로 내세운 피해자측의 눈물겨운 합의 데모인 셈이었다.

해가 짧은 오후 5시쯤인지라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고 있어서 시위군중으로 둘러싸인 최씨 집안은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최상균, 최상수 나와라! 최정옥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죄없는 우리의 동료 강은자, 양숙희의 몸과 목숨을 빼앗은, 천하의 악명 높은 치한이자 야만적인 살인마인 최상균과 최상수는 냉큼 나와라! 어서 나와서 상여 앞에 무릎 꿇고 죄 값을 치러라!”

만장(輓章)대신 플래카드를 하늘높이 치켜들고, 상여꾼들을 선두로 주력부대는 물밀 듯이 최씨네 대문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막힘 없이 마당 한복판에까지 돌진을 했다. 그리고 상여를 안채의 대청마루 문앞까지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최상균, 최상수 뭘 하고 있냐? 강은자와 양숙희가 죽으면서 이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을 해서 데리고 왔는데, 얼른 나와서 방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여야 할 것 아니냐?

우리가 안방 아랫목으로 데려다 줄까??” “야, 이 개 돼지만도 못한 바람둥이 치한들아. 이 백정 놈보다도 못한 더러운 살인마야! 어서 기어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선량한 주민들의 피 빨아먹고 공출한 식량 떼어먹고, 뇌물받아 모은 돈으로 지은, 고대강실 우지끈 뚝딱 박살내기 전에 살고 싶으면 기어 나와야 할 것 아니겠냐?”

상여를 뺑 둘러싼 몇 사람의 선봉장들이 번갈아 고함을 쳤다. 여자들이었다. 선봉장뿐만 아니라 군중 전체가 여자일색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20대 안팎의 젊은 해녀들. 최씨네 안팎을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싼 젊은 해녀들의 수효는 200여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녀들은 시커먼 작업복으로 복장을 통일했고, 얼굴에는 물안경, 손에는 바다 밑에서 전복 따고 식인상어 공격에 쓰이는 1m 길이의 쇠창살 등을 거머쥐고 있었다. 말이 항의 시위이지, 적군(敵軍)으로 단정지은 최씨 가족을 때려잡기 위한 전투태세임을 실감나게 했다.

“그 잘난 자식들 줄행랑 치고 없다면 그 잘난 애미 애비라도 나와라! 끌어내기 전에...”

군중속에서 누군가 집구석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군중들은 혹시나 하고, 귀를 기울이며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참이었는데, “에잇, 개만도 못한 족속들! 너죽고 나죽고 다함께 죽자꾸나! 집구석을 태워 버릴테다!” 이렇게 소리치며 석유통 뚜껑을 열고, 집에 불을 지르려는 찰나였다.

“잠깐! 멈춰요, 그건 안돼”

소리치며 뛰어든 사나이, 그는 이만성이었다. 그때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어슬렁거리며 마당으로 기어나와 무릎을 꿇었다. 최상균형제의 부모였다.

“여러분, 돌아가 주시오. 늙은이들이 책임지겠소” 노부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시위 군중은 곧 철수했다.

“이젠 면장 타도 문제만 남았군!” 이만성은 중얼거리며 히죽 웃었다. 그런데 노부부는 그날 밤 대들보에 목을 매 자살한 사실이 이튿날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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