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23 19: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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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5) 불을 뿜는 海女示威

진정서를 휴대하고 제주성내로 달려간 고정관 일행은 맨 먼저 미군정청으로 직행했다. 미군정청은 ‘관덕정’앞에 있는 도청(島廳)건물을 함께쓰고 있었다. 게다가 군정청 책임자인 스타우드 소령의 집무실은 도사실을 도사(島司)와 함께 쓰고있는 것도 이채로웠다.

“스타우드 소령을 긴히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만...” 도사실 에서 막 나오던 직원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고정관이 주춤거리며 대꾸했다.

“잠깐만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얼른 들어갔다 나올 테니까요” 40대로 보이는 직원은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비서실 안으로 사라졌다. 오후 3시가 지났지만 스타우드 소령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어서 고정관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니 자리에 없다고 오리발 내밀지는 않을 테지?’

“들어가 보십시오” 비서실 밖으로 걸어나온 문제의 직원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휑하니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되게 바쁜가 보군! 붙잡자는 것도 아닌데, 비겁하게 도망치긴...” 고정관은 끌끌 혀를 찬 다음 두 사람을 이끌고 비서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이게 누구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반갑지 않은 사람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고정관은 비서실 안으로 첫발을 내딛기 바쁘게, 안볼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례합니다” 고개를 꾸벅하고 떠름하니 인사말을 내뱉었다. “네, 어디서 무슨일로...? 가만있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저는 스타우드 소령의 비서 겸 통역관입니다만...”

작달막한 키에 우둥퉁한 얼굴, 그리고 뱀눈같은 표독스런 눈망울의 사나이-한번 만났던 사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별난 상판대기여서, 고정관은 첫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저쪽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생긴 대로 논답시고 음흉하게 딴전 피우는 꼴이란 눈뜨고 볼 수 없으리만큼,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하게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사람은 이쪽인지라, 어설프게 말이나 행동으로 밑지는 장사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긴가 민가 했는데, 김민광씨 맞지요? 나 고정관 이올시다. 일본에서 몇 차례 만났었는데... 오진구씨요 같은 대학이었지요? 고향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 고정관은 다가가서 덥석 손을 붙잡았다. 김민광도 마지못해 고정관의 손을 붙잡고 건성으로 흔드는 시늉을 했다.

“이거 실례가 많습니다. 뜻하지 않게 만나고 보니 어리둥절 할 수 밖에요. 일본천지에서 명성을 떨쳤던 웅변의 달인(達人)이신 고정관씨 틀림없지요? 정말 반갑습니다” “우연치곤 너무 반가운 우연인걸요. 잘 부탁드립니다.그리고 소개할께요. 나의 보통학교 후배들입니다” 고정관은 일행을 김민광에게 소개했다. 김민광은 두 사람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나서 세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

“급히 소령님을 뵙고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달려온 셈이오. 집이 서귀포 근처 한남 마을인데, 마을 안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오.

김형께서 소령님께 잘 말씀해 주셔야겠소!” 고정관은 가방속에 들어있는 진정서 뭉치에서 한 통을 꺼내 김민광에게 내밀었다.

기다렸던 것처럼 김민광은 낚아채듯 받아들기 바쁘게, 내용물을 펼쳐 건둥 건둥 읽어 내려갔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다음 봉투 속으로 집어넣으면서,

“최상균, 최상수 이 두 사람은 요즘 문턱이 닳도록 소령님 방을 들락거리던데, 오늘은 왠지 보이지를 않는군요. 다시 봐야 할 사람들이군!그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여기가 어디라구... 용서할 수 없는 인종지말 같으니라구!”

부르르 입술을 떨며 분노를 터뜨린 다음 “소령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김민광은 정의감에 불타는 사나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분연히 도사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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