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24 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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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6) 불을 뿜는 海女示威

‘좋은 반응이 있어야 할 터인데...? 아무리 교활한 인간이라고 해도 호의적인 얼굴로 들어갔는데, 설마하니 손바닥 뒤집듯 농간을 부리 지야 않을 테지? 죽으려고 환장한 ‘인종지말’이 아닌 다음에야...’

불신보다는 신뢰 쪽에 무게를 둬야겠다면서도 고정관은 안절부절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각이여삼추’로 어지간히 몸이 달아 있었는데, 벼락치듯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고개를 불쑥 내민 사나이, 그는 김광민이 아니었고 지옥의 사자를 대하는 듯 소름이 오싹 끼치는 얼굴이어서, 고정관 이하 세 사람은 움찔 놀랐다.

우람하게 치솟은 코, 샛노란 눈동자, 은빛머리칼 그리고 전봇대 같은 7척 장신의 사나이 그는 스타우드였다. 자신의 험상궂은 인상을 의식해서였던지, 눈웃음치며 ‘들어오시오!’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아,땡큐!” 고정관이 고맙다는 말로 화답을 했다. 세 사람은 긴장한 자세로 도사실에 들어갔다. 소령의 태도는 겉모습과는 딴판으로, 점잖고 무게 있게 보이면서도 애써 겸손함을 내세우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고정관이 꾸벅하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오, 링컨! 나 스타우드 소령이입니다.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뜨거운 악수를 나눈 다음, 소령은 얼굴 가득 미소짓고 고정관의 얼굴을 뚫어지게 훑어보는 것이었다.

“여기 통역관 김민광씨도 잘 알고 있지만, 고정관 선배님은 장차 대통령감 이라구요. 소령님께서 도와 주시기르 부탁드립니다” 김순익이 농담반 진담반 초면임을 무릅쓰고 폭탄선언이라도 하듯, 고정관을 하늘 높이 붕 띄웠다.

“오, 플지던트 캔데이트? 좋아요. 조선에서도 링컨 나와야해요. 통역관 미스터 김으로부터 대충 얘기들었어요. 그럼, ‘프레지던트 캔디데이트’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지워 주시오. 단 둘이서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미안합니다!” 스타우드는 김민광을 포함한 세 사람을 비서실로 내보냈다. 도사실 안에는 소령과 고정관, 두 사람이 진지한 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

“진정서관계는 곧 선처하고 통보해드리겠습니다. 그리 아시고 나의 부탁 들어주시오! 제주도사를 바꾸고 싶소. 프레지던트 캔디데이트께서 후임을 맡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소령은 글로 써서 의사표시를 했다.

“소령님은 사람보는 눈을 갖고 계시군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나는 곧 경성으로 떠날 몸이고 그 대신 제주땅에서 첫 손꼽는 적임자(김대호)를 추천해드리고 싶소. 며칠 간만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정관은 글로 써서 입장을 밝혔다. 소령은 그러자고 쾌히 응락을 했다. 글자그대로 ‘일석이조’ 두 가지 일에 횡재를 하게된 고정관은 하늘을 날고픈 기쁨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런데, 그 날 고정관 일행이 스타우드 소령과 헤어진 직후, 김민광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고정관에게 있어서는 가슴아픈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김민광은 책상서랍속에서 ‘스크랩북’을 꺼내펼쳤다. 신문기사를 오려붙인 종이조각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학병동맹’ 명단이었다.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 고정관’... 김민광은 입술을 악 물었다. 곧 진정서를 명문으로 고쳐 쓰면서 ‘빈부의 차 없는 제주 땅’을 ‘공산화될 땅’으로 둔갑시킴과 동시에, 고정관을 거물급공산주의자라고 부풀려 설명했다. 고정관과 스타우드와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튿날 오후, 고정관 일행은 발걸음도 가볍게 한남마을로 되돌아왔다.

대기하고 있던 이만성 이하 많은 간부들로부터 해녀시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 아연실색 까무러칠 뻔했다. 엄청난 돌발사건은 고정관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 치게 했으니... 진정서가 묵살됨은 말할 것 없고, 사건이 해결되긴 커녕 1백80도로 뒤바뀌게 될 판국인즉, 장차 이일을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일까? 물론 ‘면장타도사건’을 위한 성공적인 전초전임엔 틀림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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