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27 17: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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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 큰나무, 설땅이 없다

강은자-양숙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강간치사 사건의 파장(波長)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가파른 내리막길을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묘기 아닌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선의의 진정서가 살인무기와 같은, 악의의 진정서로 탈바꿈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뿐더러 문제의 진정서는 포악한 식인호랑이로 돌변하기 바쁘게 진정서에 이름이 올라있는 진정인들을 한 입에 집어삼키려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고 있으니,

꿈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기절 초풍할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고정관이 미 군정청(제주도청)으로 찾아가니 진정서를 제출하던 날, 스타우드 소령과 흉금을 터놓고 뜻 깊은 밀담을 나누고 아쉬운 작별을 했었다. 그것은 지난 26일 오후 3시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다음날인 28일자 신문기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사람은 진정인들 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치를 떨며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사람은 고정관 이었다. 사내대장부끼리 독대(獨對)를 한자리에서,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스타우드 소령은 도사(島司)자리를 맡아달라며 애원을 하다시피 했었지만, 고정관은 일언지하에 정중히 사양을 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딱한 사정 때문이다.

‘설마하니 자신의 호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해서 비열하게 앙갚음을...?전봇대처럼 키만 컸지, 속은 밴댕이의 그것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고정관은 코웃음 치며 투덜거려 보았으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리 인종이 다르고 게다가 직업이 다른 군복 입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도덕률과 신사도를 무참히 짓밟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고정관은 그 진정서를 변조한 기사를 실은 K일보 지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지면 속에서 튀어나온 스타우드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싶은, 경멸감과 증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K일보가 보도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두 처녀가 몸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게 한 강간치사 사건은 불행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2)그러나 뚜렷한 물적 증거도 없이 일제의 앞잡이였다 해서 최상균 형제를 일방적으로 범인 취급한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다.

3)쇠창으로 중무장한 2백여 명 해녀들이 사체가 들어있는 상여를 앞세우고 최씨의 집 대문 안으로 쳐들어가서, 노부모를 자살토록 위협을 가한 집단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4)제주도를 대지주도 소작농도 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만들겠다고 주장한 진정인들의 그 마음속 색깔은 도저히 묵인될 수 없는 일이다.
5)진정인 중에는 ‘조선학병동맹’간부들도 끼어있고, 2백여 명 군중을 선동하고 조종한 배후세력도 공산주의에 물든 자들이라고 보여져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어용신문으로 낙인이 찍힌 서울의 K일보라지만 사건 현장을 찾아가서 발로 취재하지 않고, 미군정당국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기사화 한 악의에 찬 편파보도였다. 감쪽같이 진정서 내용을 1백80도로 바꿔치기 한, 소름끼치는 허위 보도였다. 아무리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어용(御用)신문이라 해도 그렇지,

양쪽 말을 들어 보고 나서 기사화 하는 것이 ‘신문윤리’의 기본인데, K일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란 무엇일까? 조작된 진정서를 군정당국은 알뜰히 간직하고 있을 텐데,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면 주동자가 스타우드 소령인지 아닌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겠다.

따라서 스타우드 이든 아니든 취재기자를 매수한 장본인의 모습도 드러날 터이고...한마디로 허위기사 그것은 진정인들에 대한 도전장인 셈이었다.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군정당국을 방패삼아 최상균 형제를 감싸주기 위해 취재기자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신문기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정관 이하 진정인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미군정당국과 K일보에 엄중 항의키로 뜻을 모았다. 제주읍으로 달려가기 위해 그들은 도선 마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사나이-그는 ‘건준’ 소속 오진구 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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