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스타우드에게 정면으로 들이댔지요. ‘
우리 건준에도 똑같은 진정서가 들어왔소. 검찰, 경찰, 신문사에도...등사판으로 등사했으니까 10장도 백장도 똑같은 것 아니겠소? 자, 군정청에 들어온 진정서 내놔보시오!대조를 해봐야겠소!’ 그렇게 소리치고 제가 가지고 간 진정서를 내놨지요.
그랬더니 스타우드는 매우 남감해진 얼굴로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서있다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연발하는 것이었지요.
번역과 통역이 잘못되었으니 양해해달라며 싹싹 손을 비벼 댔지 뭡니까. 하지만 스타우드는 궁지에 몰리니까 사과를 하긴 했어도, 점령군의 위신과 자존심을 쉽사리 구겨버리지 않겠지요. 무서운 보복이 있을게 뻔해요.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보복을 한다고 봐야돼요. 약자의 설움은 늘 우리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으니 그게 문제라구요. 그래서 생각 끝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을 떠올렸고, 고정관 위원장님이 여러 간부님들과 의논하려구 이렇게 달려온 셈이지요”
오진구는 붉으락 푸르락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기관총 쏴대듯 떠들어대고 나서, 차분한 어조로 말꼬리를 사렸다. 그리곤 빳빳이 세웠던 어깨를 슬그머니 누그러뜨림과 동시에 미소짓는 얼굴로, 고정관 이하 모든 간부들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는 것이었다.
“사실...너무도 뜻밖의 일이라서 눈앞이 캄캄할 판이었는데, 오부장께서 우리들을 대신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해 주신데 대해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먼길에 일부러 찾아와 줘서, 감개가 자뭇 무량할 뿐입니다.
그런데, 통역관 김민관씨가 봉변을 당했다는 대목은...필시 곡절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간부들을 대신해서 고정관은 깍듯이 고마움을 나타낸 끝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민광에 대해 떫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물론 예상을 했던 건 아니었지만,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 설마설마 했었는데, 막상 오진구의 얘기를 듣고 보니 자세한 설명은 들으나 마나 뻔한 것 아니겠나?
하면서도, 깊은 내막에 대해서는 역시 깊은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업자득이라고,
‘매맞을 짓을 했으니 얻어맞았겠지만 죽어도 시원치 않은 녀석 죽지는 않은 모양이니, 그래도 개죽음 당할 개팔자는 아니었구나!’
싶자, 고정관은 온몸에 두드러기가 우썩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크고 작고를 떠나서 부쩍 궁금증을 돋우는 것은, 오진구 쪽에서 김민광을 겨냥하게 된 동기와 배경이 무엇일까였다.
“진정서를 접수한 그 날 저녁때였어요. 막 퇴근하려고 할 때였는데, 김민광 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 뭡니까?
대학동창이지만, 워낙 질적으로 안 좋은 친구라서, 가까스로 얼굴만 알고 지내는 처지였지요. 고향에 와서 몇차례 오며가며 노상에서 마주치곤 했어도 그냥 고개만 끄덕할 정도였다면 알조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이 아닐수 없었어요. 교활한 목소리가 한층 더 교활해진 느낌이어서 긴장해지지 않을 수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고정관 위원장님에 관한 것을 묻질 않겠어요? 조선학병동맹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 고정관 씨가 한남마을 고정관 씨 바로 그 사람이냐?
그리고 자네도 고정관 씨 잘알고 있느냐? 등 등 일본 고등계형사가 신문하듯 따져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렇다고 대꾸했지요. 저는 척하면 삼천리라고, 진정서관계임을 떠올리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왜 그러냐고 되물었었어요.
머리가 아둔한 편인 그 친구는 진정서가 ‘건준’에도 제출된 사실을 낌새채지 못했었나봐요. ‘그런 게 있어’ 하면서 몰라도 되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음, 뒤집기 공작이겠구나’ 싶었었는데, 결국 스타우드를 속이고 K일보 기자를 매수해서 엄청난 일을 저지른 셈이지요. 우리 애들에게 이실직고하고 골병들 정도로,
몽둥이세례를 받았으니 일단 최소한도의 죄 값은 치른 겁니다.” 오진구는 단숨에 글을 외듯 막힘 없이 장광설을 늘어놓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히죽 웃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로컬거버넌스] 경기 김포시, 교육발전특구 성과보고회](/news/data/20251230/p1160278487779617_377_h2.jpg)
![[로컬거버넌스] 인천관광공사, 연말 겨울여행 명소 추천](/news/data/20251228/p1160273383015143_705_h2.jpg)
![[로컬거버넌스] 전남 영암군, '혁신군정' 성과](/news/data/20251225/p1160285318798120_814_h2.jpg)
![[로컬거버넌스]인천관광공사, 연말연시 인천 겨울 명소 추천···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news/data/20251224/p1160266097659898_239_h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