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09-30 17: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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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3) 큰나무, 설땅이 없다
너무나도 우연히, 뜻하지 않게 불쑥 나타난 기상천외의 사나이 오진구. 고정관에겐 그가 ‘조선학병동맹’소속 동료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 번째로 고향 땅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른 바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맞닥뜨리고 보니,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 않은가. 지난번 ‘건준’을 찾아갔을 때 수인사를 나눈바 있었던 오진구를,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조용석과 이만성의 기분 또한 때가 때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엇갈려서 허탕칠 뻔했네요. 우연치곤 너무나도 재수 좋은 우연 같습니다. 형님들을 찾아뵈려고 부리나케 달려온 보람이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다는 뜻일까? 오진구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허둥거리며 신나게 악수를 나눴다. 앞서 ‘건준’사무실 안에서 만났을 때의 오진구와는 생판 딴 사람이다.

“그럼 딴 데 볼일 보러 가는 길이 아니고 일부러 우리를 만나러 왔다는 얘기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다는 얼굴로, 고정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뚫어지게 오진구의 얼굴을 쏘아보다 시큰둥하니 물었다.

“벌레 씹은 얼굴 안 하셔도 됩니다. 절대로 폐를 끼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아, 참 이 친구를 소개할께요. 우리 고장의 정론지인 B일보에서, 도청을 출입하고 있는 윤동성(尹東成) 기자입니다. 여보 윤기자! 인사드려요. 나의 직속상관(학병동맹)이기도한 고정관 선생이셔”

오진구는 시종일관 흐믓한 얼굴로 실실 웃으며 호들갑을 떨다 동행한 윤기자를 소개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윤동성입니다. 댁으로 가서 찾아뵈어야 하는 건데 노상에서 실례가 많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윤기자는 매우 겸손해하는 모습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정말 반갑군요. 그렇잖아도 우리 일행은 제주읍으로 가려고 여기까지 나와있었던 참이오. 제주읍에 가면 ‘건준’에 들렀다가 B일보로 찾아갈 작정이었지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귀한 손님을 만난 기분이고 보니 오진구를 따돌리는 꼴이 되어버렸을 정도여서, 고정관은 무척 기뻤다. 조용석과 이만성은 말할 것 없고, 김순익도 마치 구세주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너무 기뻤다. “자, 그러면... 여기는 시골이라 놔서 음식점이나 다방도 없고 얘기를 나눌 공간이 없어요. 여보 김순익 동지! 어쩔수 없으니 댁으로 가서 신세 좀 집시다”

고정관은 생각 끝에, 거리 상으로 가장 가까운 김순익의 집을 일회용 ‘사랑방’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의중을 떠본 것이었다.

“좋습니다. 신세랄 거 뭐 있습니까? 영광인걸요. 그렇잖아도 허락하신다면 누추하지만, 저의 집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자, 가시지요. 오늘 아주 일진이 좋았던 것 같군요. 서로 엇갈렸더라면 얼마나 낭패가 컸겠습니까?”

도선마을의 터주대감 격인 김순익은 기분이 좋은 나머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고정관이하 일행 여섯 사람은 잠시 후 김순익의 집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어젯밤 우리 ‘건준’소속 청년당원 5명이 미군정청 비서실장인 김민광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반쯤 골로 보냈답니다. 진정서에 이름이 올라있는 최상균-최상수를 일제의 앞잡이라고 하면 김민광 그치는 양코배기의 앞잡이인 셈이지요. 양코배기에게 과잉 충성한답시고 무고한 형님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다니, 그처럼 생사람을 잡는 날강도 같은 놈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제주성안은 벌집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혀 있어요. 군정청에서 ‘건준’에 사람을 보냈기에 진정서를 갖고 제가 달려가서, 스타우드에게 한바탕 했지요. 쩔쩔 맸지 뭡니까” 오진구의 흥분된 목소리는 침방울을 튀기며 줄기차게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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