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01 17: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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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4) 큰나무, 설땅이 없다
“오부장 얘기 잘 들었소. 여기 윤기자가 계시니 얘기이지만, 생사람 잡는 허위보도, 그건 서울 K일보의 자살행위 아닌가요?

B일보에 윤기자의 발로 쓴 르포기사가 실리게 되면, K일보는 신문의 생명인 신뢰성이 땅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앞잡이의 장단에 춤을 출 뻔했던 양코배기는 제 얼굴에 시커먼 숯검정을 뒤집어 쓸 뻔 했구...

한마디로 우리에게 입힌 피해와 충격이상의 어마어마한 나라망신을 시킨 꼴이 된 것 아니겠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라, 그네들도 당하고 우리도 당했으니 호위보도에 의한 우리의 타격이 더 크다고 봐야겠지?

나 고정관이나 오진구형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구요. 공산주의자라고, 아니 시쳇말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셈이 되 버렸으니까. 하긴 모함의 자료로 내세워 골백번 공산당이라고 해봤자 제주땅에서는 씨알머리가 먹히지 않는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진정서에도 중점적으로 언급되어 있다시피,

제주땅에는 지주는 있으되 대지주요 소지주가 따로 없고, 모두가 비슷비슷한 소지주들 뿐이니까. 공산주의가 발붙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말이 되는 것 아니요? 모두가 소 지주들인데,

그들의 땅을 국유화해서 누구에게 나눠준다는 건가요? 제주특유의 평등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특색이자 자랑거리가 아니겠소? 공산당으로 몰린다면 우리 모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앞으로 좀 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문제의 허위보도가 바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방치할 수는 없다고 보는데, 오형의 생각은 어떠신지...?”

고정관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30만 도민 앞에 나서서 열변을 토하는 심정으로 폭탄 선언하듯 불같은 결의를 밝혔다. 열변을 토하는 뜨거운 입김 탓으로, 방안의 분위기는 가마솥 끓듯 바글바글 들끓다 폭음이 꺼짐과 때를 같이해서 분위기는 착 가라앉는가 싶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바뀌었다. 곧 박수소리가 끝났고 방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오진구의 얼굴위로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저도 피해자중의 한사람이지요. 저도 견딜 수 없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구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있잖습니까? 저는 대표적인 피해당사자인 고정관 위원장님을 따라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김민광을 감쪽같이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고위원장님 지시를 받기 전엔 독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가 없어서, 본때만 보여주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는 급히 달려오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구...”

오진구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헉헉거리면서 고정관을 향해 매달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목표점을 향해 젖 먹은 힘을 쏟으며 뛰어가다 힘이 부친 탓인지, 발걸음 멈추듯 말꼬리를 사려 버렸다.

“망설이지 말고 어서 얘길 계속하시오. 오형답지 않게 뭘 어려워하고 있소?” 고정관이 군침을 삼키며 채근을 했다.

“망설인다기 보다 사실은... 양남욱 부위원장님께서 함께 오시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저희들만 왔습니다만...다름이 아니고, 고정관 위원장님과 조용석 형 그리고 모든 간부여러분께서 ‘건준’으로 자리를 옮겨주셨으면 해서 부탁드리려구요. 물론 김대호 선생께서 돌아오셔도 크게 환영하실 것으로 믿고 시일이 촉박하기 때문에 부랴부랴 겸사로 달려온 셈입니다.

‘건준’내부의 사정이 매우 복잡합니다. 파벌은 무서운 것이지요. 독불장군들은 무서운 존재들이구요. 김대호 선생과 양남욱 부위원장은 고립무원(孤立無援)상태에 놓여있어요. ‘건준’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도록 개편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서 사건이 미 군정청 내부에서만 빚어진 사건이라고 본다면 큰 오산이라구요. 양부위원장은 은밀히 고위원장의 도움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정관 이하 모든 간부들은 청천 병력 같은 소리에 침 먹은 지네 꼴이 되어 입들을 헤 벌린 체 번갈아 얼굴을 훑어보는 우스꽝스런 눈동자 굴리기 경쟁만을 한참동안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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