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07 17: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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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7) 큰나무, 설땅이 없다

연락선은 영락없이 일엽편주(一葉片舟), 나뭇잎 같은 조각배였다. 집채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곤 할 때마다 바다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은 연락선을 꿀꺽 삼켰다가 토해내곤 하면서 짓궂게 농락을 일삼았고, 그 바람에 죽어나는 것은 승객들이었다.

연락선은 곡예사의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처럼 신나게 파도타기 게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승객들에 대한 무차별, 무자비한 박해요 탄압이었다. 1∼2 시간이라면 그런 대로 스릴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자그마치 8시간을 ‘날 잡아 잡수’! 하고 목숨을 담보로 죽어지내야 하므로, 희망의 뱃길 아닌 죽음의 지옥길인 셈이었다.

연락선이 제주항을 떠난 지 채 1 시간도 되기 전에 승객들은 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울컥울컥 토하는 소리 꽥꽥거리며 신음하는 소리, 그리고 울음소리 한숨소리들이 뒤얽혀 땅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윤기자도 멀미에 무방비 상태임은 여느 승객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구토를 한다든가 보기 흉한 추태를 부릴 정도는 아니어서, 그런 대로 견뎌내는 축에 속했다. 그는 눈은 감았어도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애꿎은 손목시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그날 따라 손목시계는 너무도 냉혹했다. 주인을 골탕먹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전진도 후퇴도 아닌 제자리걸음만을 일삼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잠이라도 들면 꿈이라도 꾸련만, 억지로 감긴 눈은 말똥거리기만 했고, 배가 솟구쳤다. 내려올 때마다 옆 사람의 어깻죽지나 옆구리를 강타하는가 하면, 맞은편 자리에 누운 사람의 발길질로 사타구니 공격을 받아야 하고팔자에도 없는 동네북 신세가 되고 말았은즉, 사람 꼴 말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연락선이 출항한지 3시간 뒤인 밤 8시 30분께 였다. 느닷없이 숨통이 끊기는 듯 자지러지게 내지르는 비명소리에 기겁을 하며 윤기자는 날쌔게 윗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옆자리에 누워 있던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윤 기자는 여태까지 옆자리에 젊은 여인이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낌새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도대체 웬 날벼락인가?

“사,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주세요!” 머리를 풀어헤친 채 목을 놓아 통곡하듯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멀미에 시달리던 승객들이 비명소리에 충격을 받고 뺑소니 치는 데 앞장서려고, 미친 듯이 뛰어 일어나고 있었다.

“사, 사람살려요! 살인마 같은 치한이 내 몸을...치한을 때려 잡아주세요!” 최대한으로 목청을 높여 2등실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외쳤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모두가 멀미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마당에 어떻게 생긴 녀석이기에 여자의 몸을...망가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이 여자는 정신병환자...? 미친 여자가 옆자리에 누워있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자리를 옮겨 버렸을 것을...혹시 모진 놈 옆에 앉았다가 벼락 맞는 건 아닐까?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원님 지나간 뒤의 나팔’ 격인 것을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윤기자는 헛기침 한번하고 나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현듯 탈출구의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문제의 젊은 여인 둘레에 남자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를 않는다. 여학교 교실처럼 여자들뿐이었고, 남자라곤 가뭄에 콩 나기 격으로 윤기자 혼자 뿐이 아닌가?

“이것 보슈, 아가씨! 치한은 어느 쪽으로 뺑소니를 쳤나요?” 윤기자가 동정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는데, 3명의 괴한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어이, 미스 김 왜 그래? 지금 잠꼬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치한 어쩌고 그랬는데 그게 무슨소리야. 응?” 우두머리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상판 대기의 사나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막을 캐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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