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08 17: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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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8) 큰나무, 설땅이 없다

‘아, 함정이었구나! 이치들이 파놓은 함정에 내가 빠졌잖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도대체 이유가 뭘까? 망망대해 위를 달리는 연락선 안에 파놓은 함정이고 보니 날고 뛰는 사람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을 텐데,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는 날치기를 당했어요. 돈이 아니고 억만금을 준대도 내놓을 수 없는 몸을 빼앗겼다구요. 흑흑흑...” 여인은 코를 훌쩍거리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닳고닳은 능숙한 연기솜씨였다. “뭐야. 날치기라구? 몸을... 그러니까 강간을...? 누, 누구야? 어떤 놈이냐구?”

우둥퉁한 사나이의 눈빛은 이글거렸고, 목소리에서는 짤랑 하고 쇳소리가 튕겼다. 그러나 여인은 각본대로 연기에만 충실하게 함인 듯 중간과정을 생략함이 없이, 처음서 끝까지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까발리자는 속셈임을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이건 절대로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돈보다 소중한 몸을 빼앗겼는데... 나의 인생은 끝이라구요. 사실대로 있었던 일을 밝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칵 죽어 버릴거예요. 몸이 떨려서 그리고 더럽고 창피해서 입에 담고 싶지도 않지만, 오빠들 앞에서 마지막 유언장 남기는 셈치고 털어놓을 건 털어놓고 홀가분하게 북망산, 아니 용궁으로 떠나가겠어요. 그럴 수가 있나요?

오빠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요. 사내놈들은 여자 훔쳐먹는 날강도란 말은 들었어도,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멀미하느라 산송장이 돼버린 틈을 타서 팬티를 홀랑 벗기고 중요한 부분을 까뒤집고 알맹이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가 있는 건가요?”

여인은 연습을 많이 한 것인지, 아니면 연락선 타고 다니며 직업적 상습적으로 연극을 해온 것인지, 박진감 넘치는 목소리로 연기력을 발휘했다. 2등실 안의 승객들은 언제 배 멀미를 했더냐는 듯이, 군침들을 삼키며 돌팔이 여배우가 벌이는 희한한 연기력을 감상하느라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이 친구인가? 밑천하나 안 들이고 미녀의 방 잠근 문을 뜯고 들어가서, 보물단지 빼돌리고 달아난 하늘아래 둘도 없는 날강도가...?” 역시 우둥퉁한 사나이가 허리를 꾸부리고, 손가락 끝으로 윤기자의 뾰족한 턱주가리를 치켜올린 다음, 경멸하는 눈으로 얼굴을 쏘아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죄인이 된 기분이라기 보다는 너무도 기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윤기자는 가타부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겠지? 기왕지사 엎질러진 물인데, 도로 주워담을 수도 없잖아?

나는 얘 오빠되는 사람이요. 잠깐 얘기나 합시다. 여기는 눈과 귀들이 많고, 자칫 소란이라도 피우게 될 경우 승객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것 아니겠소? 조용히 나가서 우리끼리 얘기합시다. 그럼 자네들이 앞장서서 안내하지! 나는 얘를 부축해서 따라갈 테니까요”

윤기자는 괴한들에게 개 끌듯 2등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거센 바람이 파도를 무기 삼아 연락선 몸통을 눈코 뜰 사이 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뱃전으로 윤기자를 끌어낸 괴한들은 빠꼼히 문이 열려있는 화물칸 안으로 눈 깜짝하는 사이 윤기자를 밀어 넣고 말았다. 밖으로 문을 닫은 다은 괴한들은 문틈을 이용해서, 분무기를 휘둘러 살충제를 한참동안 숨돌릴 사이 없이 뿌려댔다.

‘아, 귀신도 모르게 나는 죽는구나! 김대호 선생은 왜 안보일까? 그분이 손을 써 주신다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도 있을텐데...’ 여기까지 생각하다말고, 윤기자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윤기자의 굴욕적인 체험담의 제1막은 미완성의 장(章)인 채 막을 내렸다. “연락선도 맘놓고 못 타겠군! 혹시 신문기사에 원한을 품은 어떤 집단의 짓이 아닐까?”

조용석이 투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기자의 말을 더 들어보자구요. 어떻게 기사회생, 살아 돌아오게 되었는지?” 이만성이 침통한 얼굴로 의견을 말했다. “잠을 깨고 보니 목포항이었어요. 김대호 선생도 안 보였고 찾을 길이 없어서 그냥 되돌아 왔지요” 윤기자는 허탈해진 모습으로 싱겁게 피날레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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