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13 17: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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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큰나무, 설땅이 없다

방안의 여섯 사람은 가슴을 활짝 열고, 각자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거침없이 의견을 내놓았다.

마치 수사관들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 앉아 머리를 짜내느라 진땀 흘리는, 긴급수사관회의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가까스로 중증학교 과정(농업실수학교)을 마친 게 고작인 김순익을 제외하고, 다섯 사람은 전문학교와 정규대학을 다닌 쟁쟁한 엘리트급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수사계통의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30만 ‘괸당’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아온 큰 별을 졸지에 잃고, 생사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들을 짜내느라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마당이고 보니, 직업적인 수사관 회의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호칭불명의 고차원 비밀회의인 셈이었다.

여섯 사람이 저마다 조심스럽게 내놓은 의견들은 한결같이 폭도 넓고 무게도 있고 깊이도 있다는 점을 특색으로 꼽을 만 했다. 그러나 얼핏 겉으로 보기엔 6인 6색으로서 개성과 색깔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세밀히 검토하고 분석해보면 알맹이는 엇비슷했다. 3인 3색- 고정관과 이만성은 같은 의견이었고, 조용석과 김순익 그리고 오진구와 윤기자는 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조종한 배후세력은 하나 아닌 둘일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의견들이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 미군정청 통역관 김민광이 개재되었음 것이고 2. ‘건준’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의 부산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오진구가 2항을 주장하는 충격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자못 경악케 했다.

“여러분은 ‘벽의 구멍’을 아십니까?” 오진구는 이미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배후세력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겠다는 단서를 붙였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구멍’운운하는 소리가 튀어나온 바람에,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였다.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건준사무실 안에 그런 게 있다구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공개를 하긴 합니다만, 듣고 나서 비밀에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는 곧 알게 될 겁니다. 지난 23일 고정관 선배님을 위시해서 조용석, 이만성, 서명천 동지 등이 건준을 방문했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 머리를 꺼낸 오진구는, 그 날 자신만이 알아낸 비밀을 혼자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다가 지금 공개하게 되었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그 날 비서실에서 네 사람은 오진구, 김덕규(훈련부장) 등과 수인사를 나누고 심심풀이 환담을 벌이고 있었다. 김대호가 회의를 끝내고 비서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모두들 입을 다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김대호는 인사소개가 끝나자 오진구와 김덕규를 밖으로 내보냄과 동시에, 네사람의 방문객을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때 오진구와 김덕규는 복도에서 헤어졌다. 김덕규가 ‘관덕정’ 쪽으로 걸어가는 뒷 모습을 확인하고 오진구는 ‘건준’ 사무실 안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직원들과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돌아 위원장실 앞에 걸어왔을 때였다.

그는 김덕규와 정면으로 따 마주쳤다. 천만 뜻밖의 해후(邂逅)였다. 김덕규는 굳어진 얼굴로 위원장실을 나오다 오진구를 보자 당황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위원장님 안 계신 데 거기 들어가서 뭘 했어?”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김덕규의 귀엔 꾸짖는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위원장님이 계신 줄 알았는데, 안 계셔서 나오고 있잖아?”

주눅이 든 얼굴에 곤혹스런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두 사람은 곧 복도에서 헤어졌다. 궁금증에 쫓긴 나머지 오진구는 발길을 위원장실 안으로 돌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낮도깨비에게 끌려온 듯 그는 넋을 잃고 텅 빈 방안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더규는 ‘관덕정’쪽으로 가는 체하다 왜 위원장실로 되돌아와왔던 것일까? ‘그리고 약 30분동안 텅 빈 방안에서 혼자 뭘 했을까?’ 그 때였다. 부위원장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서, 오진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벽 가까이로 바싹 다가섰다. ‘아니, 이런게...?’ 그것은 도청(盜聽)용 구멍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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