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16 18: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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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4) 큰나무, 설땅이 없다

이렇데 젖비린내 나는 여자아이 데리고 음담패설이나 지껄일 때가 아닌데, 내가 어느새 이성을 잃었단 말인가?

십중팔구 고인이 되었을 터인 김대호 선생이 구천에서 내려다보고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이만성은 쥐구멍 찾고픈 심정이 되었지만, ‘우리’속에 갇힌 몸인지라 속수무책이다. “오빠는 제가 싫으세요? 오빠의 답이 저의 답이란 것만 알고 계심 돼요. 누가 쳐들어와도 문 안 열어줄 테니까 맘 푹 놓으셔!”

“오늘 뿐이 아니고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텐데, 왜 못 참고 이러는 게야? 우선 얘기부터 하자 응! 내가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실없이 그냥 들른 것 같은가?” “궁금하지 않는데요. 저는 다 안단 말예요.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셨다는 걸...그렇죠?” 잠시 떨어져 있다가 벼락치듯 이만성의 앙가슴을 겨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만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쳐도 그냥 미친 게 아니고 신들린 환녀(宦女)의 발광인 것 같아서 두렵고 서글펐다.

“잠깐 입술 멈추고 내 말부터 들어보란 말야!” 이만성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고 두 손으로 떼밀자, 그제서야 엉거주춤 고개만 뒤로 젖혔다. “물론 영선이도 보고 싶었고 어머님도 뵙고싶어서 왔어. 영선이 나를 반기는 심정 잘 알고 있다구.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엄청난 일이벌어졌단 말야. 내 얘기 듣고 나면 내가 끌어안고 즐기자고 해도 영선이는 응하지 않을걸 아마! 자! 엄숙한 태도로 내 얘기를 들어봐. 응!”

“도대체 무슨 얘긴데 그래요? 설마하니 만나자 이별이라는 날벼락 같은 얘기는 아니겠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마주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르고 있었고, 눈동자는 멀거니 초점이 흐려진 상태였다. “아직 확실한 내막은 알 길이 없어. 그러나 비관적이고 절망적임엔 틀림이 없단 말야. 내입에서 어떤 종류의 끔찍한 얘기가 튀어나와도 기겁을 하거나 까무라치지 않을 자신있겠어? 자신 있다고 하면 말하겠지만 그와 반대일 경우엔 얘기할 수 없다구. 어느 쪽인지 분명히 얘길 해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아무리 무시무시한 얘기가 나와도 까무라치지 않도록 노력해볼께요. 얘기해보세요. 각오가 되어있으니까요” “좋아, 그럼 굳게 약속했어! 얘기하지!” 그렇게 당조질을 받았지만,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려지면서 이만성은 약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어물쩍거리다 떨리는 입술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나절 김순익의 집에서 윤기자와 오진구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떠듬떠듬 늘어놓았다.

“아버님의 생사문제에 대해 50:50 반반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절망적이라고 보고있어. 십중팔구 돌아가셨다고 본다 그 말이야. 눈앞이 캄캄해서 가까스로 달려왔다니까”

“....................................”

이만성이 피눈물을 머금고 그쯤 털어 놨다면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법하고, 눈물이 말랐다면 얼굴에 울상이라도 지어야 그게 정상이련만, 웬일인지 그녀의 얼굴이 이렇다할 변화가 없다. 글자그대로 마이동풍(馬耳東風) 한쪽 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버리는, 그야말로 사람의 말이 말 같지 않아서 안들은 것으로 치자는 그런 속셈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열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짓궂게 떠오를 정도로, 영선의 맘속을 미루어 헤아릴 수가 없다. 혹시 친아버지가 아니고 의붓아버지...?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철천지원수가 아닌 바에야 어머니의 남편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것 같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눈썹 하나쯤 까딱한다 해서 덧 이라도 날까봐 저렇게 태연해 하고 있단 말인가? 놀라거나 까무라쳐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은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유가 뭘까? “괜히 내가 해선 안될 말을 했나보군! 느긋하게 기다려 보는 것만이 상책일 테지? 자 다음에 들를게!” 이만성은 단호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번 다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막된 간나위라고 생각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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