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0-27 18: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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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5) 위장진지로 가는 길
‘아, 서병천 저 사람은 다시 쳐다봐야 할 별난 사람이구나! 나쁜 뜻에서가 아니라 선의의 좋은 뜻에서...’

고정관, 조용석, 이만성, 김순익 등은 서병천의 그 장황한 얘기를 지루하다 않고 끝까지 경청하고 나서, 감탄의 도를 지나 소름끼치는 전율까지 느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름끼치는 전율이란 요컨대 그들 자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말하자면 아무나 내다볼 수 없는 강 건너 머나먼 언덕 끝까지 꿰뚫어 관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공포의 지뢰밭 위를 무심코 걷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안의 공기는 마치 영하의 날씨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얼음장모양 굳어버렸고, 그들의 얼굴 위에는 자책과 자괴의 찌든 흔적만이 역력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신문기사의 파급효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확산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더랬는데...”

고정관은 움푹 파인 눈망울을 끔벅이면서 스스로를 꾸짖기라도 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주어져 있지를 않았다.

“민족반역자-일제 앞잡이들의 결속이라...? 서형 얘기 듣고 보니 수긍이 가는군요. 녀석들은 이제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겠다는 숙명적인 꼬투리를 악착같이 물고늘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요”

조용석이 뒷북치는 기분이어서 시큰둥한 목소리이긴 했어도, 옹고집의 대명사인 그도 별수 없이 서병천의 내세운 논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별수가 없었다.

“검은 구름조각들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꾸물대지 말고 부쩍 서둘러야 될 것 같네요. 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나서, 반격에 나선다는 것은 이미 패배를 뜻하는 것이니까요. 선제공격,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어요. 서형의 말씀그대로, 급히 서둘러야 할 것은 ‘유비무환’ 임이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 ‘유비무환’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고, 빈틈없는 ‘조직’과 철통같은 ‘거점’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서둘러야 되겠어요”

이만성도 심각한 얼굴 침통한 목소리로 의중을 밝혔다.

“저도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순익이 버릇처럼 손을 들고 짤막하게 허두를 꺼낸 다음, “선배님들의 고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벌써 만시의 탄이 없지 않습니다. 차일피일 미루어서는 안될 일이지요 김대호 선생실종은 이미 제주땅에 일제의 망령보다 더 무서운 망령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경성 K일보의 기사가 보여준 것처럼, 고정관 선배님을 필두로 진정서에 서명한 모든 사람들을 소위 ‘빨갱이’로 낙인찍으려는 음모를 이 땅의 30만 괸당들은 눈을 의심하면서 들여다보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B일보의 반박기사만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도 없는 일이란 말요. 기왕지사 독거미를 때려잡기 위해 손을 대었다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대갈통을 박살내야 해요.

저의 주변 애들은 아직 조직이 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언제이고 호루라기만 불어 제꼈다 하면 여기저기서 함성을 내지르며 벌떼같이 일어서게 되어 있어요. 저는 선배님들께서 명령 내려 주시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셈이에요”

김순익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바로 때는 이때구나 하고 찌뿌드드한 분위기에 활기 넘치는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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