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1-03 17: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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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0) 위장진지로 가는 길

“비록 군인들이긴 해도 그네들의 조국은 지구상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민주주의 나라입니다.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이 분립되었고, 언론자유를 비롯해 출판·집회·결사·신앙 등 모든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그게 미국이라는 나라지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자 세계 제1의 초강대국-그게 또한 미국이거든요.

미군들은 비록 군복은 입었어도 군인이전의 인간, 미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태어나서 잔뼈가 굵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다 해도 ‘인지상정’이라는 점에 차이는 없을 테니까요. 민의(民意)의 뜻을 그네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을터이므로, 인종과 민족이 다르다 해서 외면하려들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관광면장을 민의의 힘으로 타도하는 것- 그것은 이 땅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시범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물리적인 힘으로 생명을 빼앗지 않고, 민의의 입김에 의해 산송장 만드는 것으로써 승리의 효과를 거두자는 것입니다.

30만 도민이 일제히 총궐기할 수야 없겠지만, 이곳 저곳에서 파상적으로 들고일어난다 해도 관광면장 같은 반민주적인 신임면장들을 몰아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싶어요. ‘건준’의 김대호 선생도 똑같은 계획을 세웠었지만, 그것이 화근 이였던지 어둠 속의 검은 세력들에 의해 끌려 가버린 몸이 되고 말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관광면장 타도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우리는 더욱 분발해서 보아란 듯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다질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함주에서 일제말기의 김 모 면장 암살사건이 일어난 만큼, 미군정당국의 입장은 난처해졌을 게 아니냐고 여겨진다구요. 필요이상으로 민감해질 수도 있고, 도전이나 도발의 전주곡으로 착각한 나머지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고려해 넣고 참작하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으므로, 지혜와 힘을 모으는 데 게을리 함이 없어야겠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의견들을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만성은 격앙된 목소리로, 그러나 차분하면서 이로 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폈다.

어느덧 방안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거쿨진 목소리로 불만을 털어놨던 김순익의 기고만장한 얼굴 위에서 태산같은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여러 사람의 귓전을 두드렸다.

쥐구멍을 찾고픈 심정이 되 김순익의 몰골이야말로 글자그대로 목불인견-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궁지에 몰려버린 김순익의 그 문제의 발언에 대해 비난하거나 지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그럽게 이해하고 뜨겁고 두터운 동지애로 감싸주자는 무언의 배려 때문이었다.

수준급 발언과 수준이하의 발언 사이에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누구는 잘했고, 누구는 못했다는 식으로 저울질한다는 것은 동지애를 깨뜨리며 결속을 가로막는 행위라는 것을, 방안의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순익의 근시안적인 논리의 밑바탕에는 활화산 같은 투지와 폭발력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높이 평가하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방안의 사람들은 그런 김순익이야 말로 미움의 대상이긴 커녕 미덥고 자랑스런 존재로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음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어떤 작전을 쓰든 간에 특공대작전은 필수적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김순익동지의 방법과 이만성 동지의 방법을 혼용한, 획기적인 종합작전이 요청된다고 보여집니다. 무슨 뜻이냐고 하면...”

고정관이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역시 우두머리답게 차원 높은 견해를 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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