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1-06 17: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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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3) 위장진지로 가는 길

“그래서... 업은 아기 이레동안 찾는 격이라 더니, ‘제주땅에도 훌륭한 선배님들이 계신 줄을 모르고 절망상태에 빠져있었잖아!’ 하고 부랴부랴 뛰쳐나온 겁니다. 막상 찾아뵙고 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과연 존경할만한 선배님들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꿈 같기만 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니까요. 백만대군을 얻었다 한들,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부족한 저희들을 버리지 마시고 지도편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부종운의 꾸밈없는, 진솔한 고백이자 당부였다.

“이거 너무 과찬의 말씀을...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다니까. 변변치도 못한 사람들을 천리길도 멀다 않고 찾아와서 그나마 실망하지 않았다니, 그 점은 다행한 일이오 만, 어떻게 도와드려야 보람을 느끼게 될지 자신이 없어놔서 그게 걱정이란 말요. 어쨌거나 인연은 맺어진 셈이오. 누가 돕고 누가 도움을 받느냐는 차원을 떠나서, 전우애와 같은 동지애를 불태우는 것 그게 값있고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우리들은 십년지기(十年知己),

막역한 친구이자 혈맹의 동지 같은 투혼을 불태우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뜻 깊은 일 이라고 생각해요. 자, 우리 이제부터 실컷 젊음을 불태워 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의 가는 길에 어떠한 난제가 가로놓였다 하더라도, 과감히 헤쳐나갈 것을 굳게 다짐합시다!”

양윤근, 부종운 두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뜻에서 고정관이 선배다운 모습 정감 어린 어조를 위로와 곁들여 격려의 말을 들려주었다.

두 사람은 흐뭇한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는 듯,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방안의 사람들에게 흐뭇함을 안겨주었다. 서병천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5분이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후 10여분이 흘렀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없이 대문 쪽을 내다보곤 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서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투박하게 들려온다 싶더니, 낯익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서병천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5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많이 기다리셨지요?”

헐떡거리며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40대 사나이를 바라보며, 방안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허름한 작업복차림의 사나이, 그는 묵직한 보따리들을 산더미처럼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자, 이쪽으로 와서 지게를 세우고 보따리들을 툇마루 위로 내려놔 주시지요” 서병천은 지게꾼에게 지시하고,

“제가 사실은 오늘과 같은 뜻 깊은 날에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여러 동지들께 모처럼 점심이나 대접해야겠다 싶어 가게 쪽으로 나갔더랬습니다. 식당은 없었고, 가게라곤 딱 두 군데가 있었는데, 먹을만한 게 없더군요. 빵과 과자 따위가 고작이었어요. 마침 소주와 맥주 몇 병이 있기에 몽땅 떨이하고, 안줏감으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있는 대로 툭툭 털어서 챙겨보았습니다만 변변치가 않아서... 출출 한대로 적당히 점심이나 때우고, 요다음 서귀포나 제주성내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서병천은 제멋대로 자리를 이탈한 까닭을 실물과 곁들여서 푸짐하게 설명해 주었다.

선심 쓰는 이유를 알 까닭이 없는 방안의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입맛을 쩝쩝 다시기에 바빴다.
방안은 순식간에 빵 가게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빵과 과자와 조촐하지만 주안상을 곁들인 연회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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