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1-17 17: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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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6) 범인들은 오리무중

선박회사에 들렀다 나온 윤기자는 잠시 후 칠성통골목안으로 들어섰다. 제주성안의 번화가인 칠성통에는 B일보사가 자리잡고 있었고, 양복점, 양장점, 음식점, 고급요정 그리고 2개의 다방과 2개의 당구장 등이 있었다. 윤기자는 신문사로 들어가려다 말고 발길을 근처 다방 쪽으로 돌렸다.

수첩에 적힌 8명의 용의자 속에 과연 3명의 범인들은 끼여있을까? 끼여있기만 한다면 범인을 붙잡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따로따로 흩어져 있든 한군데 뭉쳐있던 윤기자의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윤기자는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나절이어서 그런지, 다방안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는 조명이 어두운 구석 쪽에다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기 바쁘게 수첩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선박회사에서 정신 없이베낀 8명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해보기로 했다.

㉠김원우(金元宇. 남자. 23세. 모슬포) ㉡강치완(康致完. 남자. 21세. 관광리) ㉢조영석(曺英錫. 남자. 24세. 모슬포) ㉣장상익(張相益. 남자. 22세. 일도리) ㉤이형수(李亨秀. 남자. 22세. 서귀포) ㉥이영희(李英姬. 여자. 23세. 신도리) ㉦김선옥(金先玉. 여자. 23세. 신도리) ㉧김정애(金定愛. 여자. 25새, 한남리) 이상 8명.

윤기자는 점검을 끝냈지만, 펼쳐놓은 수첩을 덮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첩속의 8명의 명부, 그것들은 각각 해당자의 가슴에 붙여진 이름표였고 얼굴들이기 때문이었다. 질문을 던지면 대꾸할 것 같고,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면 날쌔게 뿌리치고 뺑소니 칠 것 같은 몰골들이 아닌가.

윤기자는 대낮 도심에서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시후 냉정을 되찾고 번쩍 눈을 떴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하게 눈길을 끌어당기는 이름하나가 있었다. 여자였다. 관광면 ‘한남마을’이 주소로 되어있는 25세의 여자 김정애.

한남마을 하면 고정관, 조용석, 이만성 등 기라성 같은 젊은이들의 고향마을 인데, 하필 그마을에 용의선상에 떠오른 여자하나가 숨어있었다는 것은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설마하니 김정애 그여자가...?

아직은 얼굴을 확인하는 절차가 남아 있는 터라 앞질러 범인중의 하나로 단정하기엔 시기상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기자는 그 날밤 선실안에서 자신을 치한으로 몰았던 용서 못할 간나위, 그게 김정애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달려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더없이 간절하지만, 급하면 돌아서 가랬다고 맨 나중으로 미루는 것도 슬기로운 방법이 아니겠느냐 하고, 느긋하게 다짐을 했다. 오부장은 먼발치로 뒤를 따라오다 어디로 발길을 돌렸을까? 애꿎은 오진구부장, 학교 선배이자 직장 상급자이기도한 그를 골탕먹이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되자,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범인들은 김대호 선생을 바다에 처넣어 수장시킨 것으로 부족해서, 오진구부장과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되자 윤기자는 더 이상 다방 한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자 한남마을로! 좋은 소리로 자백 받기란 애당초 바라지를 말아야겠지?’

선실안에서 연출했던 연극을 다시한번 해보라고 다그치고, 그래도 응하지 않을 때엔 동네 한복판으로 끌어내 발가벗긴 다음 그 잘난 아랫도리 공개하라고 엄포를 놓는다면, 제가 무슨 재주로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윤기자는 진짜 치한이 될 각오로 부딪쳐보고 싶었다. 윤기자는 히죽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불쑥 나타난 낯익은 얼굴-오진구 부장이었다.

“형님이 여기까지... 혹시나 했었는데 오셨군요!” 10년 만에 만난 옛 친구 대하듯 윤기자는 요란스럽게 악수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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