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1-20 1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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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9) 범인들은 오리무중
5명의 거한들을 장터로 내보내긴 했어도 우물가에 기는 아기 두고온 기분이어서, 어진구는 잠시도 꾸물거리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문득 생각난 것은 금이야 옥이야 하고 애지중지해온, 보신용 장비나 다름없는 카메라 그것이었다.

그는 점퍼 호주머니 속으로 한쪽 손을 집어넣었다.

육중한 물체가 숨을 죽인채, 주인의 명령만 내려주면 천둥번개 날벼락을 떨구겠다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얌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만져본 순간, 오부장은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는 다방을 나왔다. 철성통-관덕정 앞을 거쳐 남문통 가파른 길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가 파출소 가까이 걸어갔을 때였다. 어디선가 귓전을 때리는 호루가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엉거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 호루라기 소리는 몇차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환청(幻聽)같기도 했지만 환청은 아니었다. 알고보니 소리의 출처는 5일시장 쪽이었다. 그는 파출소에 들르려던 발걸음을 5일시장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무턱대고 장터안으로 뛰어드는 데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그는 퍼뜩 깨달았다.

장터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널따란 벌판이었다. 장이 열리는 날에는 왁자지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몰려가곤 하지만, 평일에는 썰물때의 갯벌처럼 살벌하고 황량할 뿐이었다.

도깨비집 같은 허름한 가건물들이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음이 고작이었고, 성내 한복판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무인지경’이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윤기자는 장터안으로 들어선 순간, 느닷없이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전율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동서남북 4방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시야에서 수상쩍은 그림자는 포착되지 않았다.

까닭없는 전율-그것은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경각심 돋우는 적신호로 받아들이기를 재촉한, 신의 계시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 이게 바로 신문기자의 센스라는 것이구나!” 그는 자신이 신문기자를 천직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신념을 우연히 확인한 기분이어서 무척 흐믓하고 기뻤다.

“그나저나 미행자가 나타날 법 한데…?”
장터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간 다음,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수상쩍은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인작전은 실패…? 그래도 그는 체념하거나 후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동쪽 끝까지 걸어가기로 결심을 했다. 미행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기엔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허름한 가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건물안에서 2개의 검은 그림자가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윤기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허름한 양복차림의 두 사나이-키는 작달막하지만, 어깨가 딱 벌어지고 뚝심께나 쓸 것 같은 씨름꾼 타입의 괴한들이 아닌가.

두사람 모두 얼굴에 까만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어서, 밝은 대낮인데도 얼굴의 요모조모를 뜯어 볼 수가 없다.

두사람은 거의 동시에 두팔을 짝 벌리고 윤기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괘씸하기 짝 없는 진로방해였다. 천야만야 낭떠러지를 만난 듯 윤기자는 전진하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일 글자그대로 진퇴양난인 셈이었다.

“윤동성씨 틀림없지요? 오랜만에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인연이란 묘한 것이군! 아무튼 반갑소, 긴히 할 얘기가 있소. 잠깐 들어 가실까?”

키가 좀 커 보이는 사나이가 게걸스럽게 수작을 떨면서 손가락 끝으로 가건물쪽을 가리켰다. 여지 복병이 있을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을 것인가? 윤기자는 어이가 없어서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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