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1-24 16:31:13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1) 범인들은 오리무중

B일보기자 윤동성이 제주성내에서 김대호선생 살해범으로 보이는 악당을 뒤쫓고 있을 무렵, 한남마을에서는 김영선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발벗고 나서서 고군분투, 눈물겨운 맹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이만성 또한 뒷짐지고 강건너마을 불구경하듯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까닭이 없었다.

알고보면 윤기자나 김영선은 도의적으로 또는 혈육관계니까 으레 발벗고 나설 수 있다는게 상식이다. 반면에 이만성의 경우는 명분론에 있어 뒤로 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상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이만성이었다.

그는 첫발을 한남마을로 내딛었다. 경성 K일보기사를 정면으로 반박한 충격적인 기사가 B일보에 보도된 이튿날인 11월1일이었다. 그날 아침나절 집으로 찾아온 서병천과 함께 도선마을로 내려가 고정관·조용석·김순익 그리고 함주에서 왔다는 두 청년들과 함께, 김순익의 집에서 획기적인 모임을 가졌던 감회 깊은 순간을 잊을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 모임이 끝나자 고정관·조용석·서병천 등은 제주성내로 떠났다. 이만성도 그들과 동행키로 되었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고, 그 길로 곧장 한남마을을 향해 달려나갔다.

오후 3시께에서 밝은 대낮에 김영선을 집으로 찾아 간다는게 남들의 귀와 눈이 있어 쑥스럽고 멋쩍고… 좀처럼 맘속으로 내키지 않았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굳게 결심을 하고 다짜고짜 그녀의 집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때마침 ‘정남’(대문)은 열려져 있었어도 방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사람이 방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다분히 어중간한 분위기였기에 잠시 망설이다말고 헛기침을 한 다음, “실례합니다. 주인아주머니 계십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알렸다. 반응이 없다. 집을 비우고 잠깐 외출을 한 것일까? 그러나 직감은 그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이 아니라 없어도 있는 것처럼 넘겨짚고 다부지게 부딪쳐보는 마음의 자세가 아쉬운 때임을 깨닫자, 호기심 같은 것이 부쩍 솟구쳤다.

“실례합니다. 안에 누구 안 계십니까? 네? 안에 누구 안 계시냐구요?”

짜증섞인 목소리였지만, 눈꼽만큼도 악의가 깃들여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꾸가 없다. 이거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구나! 그는 다시 한번 뒤풀이해야겠다 싶어 방문가까이로 성큼 다가선 다음, “안에 누구 안 계십니까? 계시면 대답 좀 해 주십시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으름장 같기도 하고 하소연 같기도 하고, 색깔을 구분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가부간에 판가름이 나겠지? 귀를 쫑긋 세우고 방안의 분위기를 가늠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귓전에 와 닿았다.

“누, 누구 오셨수꽈?”

숨결이 헐떡거리는 신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맘속으로 무릎을 탁 치며 이만성을 방문가까이로 바싹 다가섰다.
“저, 이만성입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하고 화닥닥 방문을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그는 최대한으로 자제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잃었던 냉정을 되찾았다. 진득하게 서있는 자리에 말뚝 박힌 것처럼 옴짝달싹 않고 서있자니, 그 고역 그 초초함이야 말로 죽을 맛 이였다. 일각이 여삼추로, 한참 뜸을 들인 끝에야 어렵게 어렵게 방문이 반쯤 빠끔히 열렸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개를 내밀지 않은 채, “오, 오빠 오셨어요? 들어오시지 않구...”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영선, 그러나 그 목소리 여느 때의 그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며칠 새에 중환자로 변하다니... 이만성은 더럭 겁이 났다. 화닥닥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