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3-12-13 17: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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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9) 군중소리 발포소리
저 사람이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손을 든 사나이의 앞과 뒤 그리고 좌우로 화살 꽂히듯 꽂혔다.

“뭐가 궁금한지 얘기해봐요. 아는 데까지 답변해 줄 테니까!”
서원형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채근을 했다. 들었던 손을 내리고 30대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문… 3·1운동은 규모는 컸지만, ‘법정사 항일투쟁’보다 뒤늦게 1년후에 일어났고, 주동자들에 대한 형량도 가벼웠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국내외에 알려졌지 않습니까/ 그러나 ‘법정사 항일투쟁’은 그 지원지가 우리 도선마을인데도, 27년동안 도선마을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게 사실이 아닙니까? 투쟁에 나섰던 선열들의 후손들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 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좋은 질문입니다. 중요한 대목을 지적해 주었어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제주도는 작은 대륙이자 큰 섬입니다. 4면이 바다로 뺑 둘러싸인 낙도이다보니,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야 할 파급기능이 차단된 상태였지요. 게다가 3일동안 불꽃을 터뜨렸다가 육지부에서 응원부대가 대량으로 투입된 바람에 제주안에서 조차 구석구석 파고들지를 못했던게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3·1운동은 거물급인사들에 의해 주동이 되었으나 ‘법정사 항일투쟁’의 선봉장들은 거의 무명인사들이어서, 육지부로 소문이 퍼지지 못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보여집니다.-

첫 타자의 질의에 대한 응답이 끝나자 두 번째 타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서 노인은 10여명의 얼굴들을 싹 훑어보고 나서 그 중 한사람을 골라 손가락으로 지적했다.

◇문… 성난 군중들이 서귀포 쪽을 첫 공격 목표로 삼고, 한꺼번에 몰려간 이유는…?

◇답… 서귀포에는 제주도 검찰지청과 경찰서와 거의 맞먹는 경찰주재소가 있었고, ‘일본인 상인들의 거리’가 따로 있었어요. 그것들을 때려부수는 것이 목적 이었다구!-

◇문… ‘법정사 항일투쟁’은 3일 동안 계속 되었다가 육지부에서 몰려온 진압군에 의해 용두사미꼴이 되고 만 셈인데요, 그 다음이 궁금하거든요. 무자비한 총칼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는 진압으로 끝내지 않았을 터인데, 사후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대목을 아시는 대로 밝혀주십시오!

◇답… 야만적인 방법으로 보복을 일삼았고 인권유린을 밥먹듯 자행해왔다고 말하면, 겪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곧이 듣지 않을 거예요. 세계의 눈과 귀가 있으니 모조리 죽여 없애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도 죽은 사람 못지 않게 끔찍한 학대를 받기 일쑤였고…. ‘법정사’를 폐쇄시키는 만행도 불사했다면 다 알지 아니하겠소? 그 뿐만도 아니지요. 가뭄에 콩나기 격으로 관광면 출신 인사가 끼었었다고는 하지만, 행정책임자인 면장을 거의 외부사람들로 기용함으로써 음으로 양으로 면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박해와 핍박을 안겨주었던게 사실이었다니까?-

◇문… 여자들도 ‘법정사 항일투쟁’의 대열에 한 몫 끼였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많은 젊은 여성들이 혈서까지 쓰면서 떼지어 몰려가서, ‘법정사’ 마당을 가득 메웠었다구요. 그러나 지휘부에 협의 끝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예요. 불을 보듯 뻔한 희생은 남자들만으로 족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지. 여성들까지 동원되었더라면 군중수는 10만명도 더 되었을 껄, 아마!-
이상으로 질의 응답은 끝났고 강연회도 막을 내렸다. 김순익은 이만성·서병천 그리고 4명의 특공대원과 10여명의 중견청년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D데이를 5일 남기고, 역사적인 출정식을 치르기 위한 만반의 준비태세로 들어갔다.

첩자를 뒤쫓아 관광마을을 다녀온 김순익의 심복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곧 관광마을에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움직임에 대해 보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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