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4-01-07 18: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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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널따란 회의실 한복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달아나는 패잔병의 얼굴처럼 창백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피를 강요하는 공포의 총소리 앞에 얼어 붙어버린 비굴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실의에 빠지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쫓기는 입장에 놓인 대표적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고향이 좋다지만, 의리와 인정에 사로잡혀 멀건이 눌러앉았다가 귀신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장이 아니겠는가?

고정관·조용석·이만성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죽음의 사지에서 탈출해야겠소‘하는 글귀가 저마다의 얼굴에 번듯하게 씌어져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병천-이 고장 사람도 아닌 서병천의 얼굴만은 판이하게 달랐다. 눈곱만큼도 그의 얼굴에는 실의와 좌절따위로 일그러진 구석이 없었고, 좀 부풀려서 말한다면 하늘을 찌를 것 같은 투지와 자신감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들 경황이 없고 얼떨떨해 있는 판에, 여러 선배님과 동지들을 오시도록 해서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우리는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고’가 아니라, 승자임과 동시에 패자이고 패자임과 동시에 승자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오만해서도 안되지만, 위축되어서도 안된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취할 바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요컨대 이 말은 우리의 과업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제1차 실패의 발자국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는 제2차 도정에 대비하는 슬기롭고 치밀한 작전계획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여러 선배님과 동지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된 겁니다.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어드렸으면 싶어서, 외람되게 여러분을 오시도록 했습니다. 너그러운 양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관광면장 이종상이 무술인들을 끌어들여 민의와 맞대결하겠다는 엉뚱한 비약,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지요. 아무리 친일파 괴수라 한들, 화류계 여성 몸 팔 듯 코잡이에게 빌붙어 면민을 학살하려고 승전국의 군대를 하늘 두려운줄 모르고 선량한 민중앞에 어떻게 내세울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제는 왜놈 오늘은 양코배기를 출세와 치부의 도구로 써먹다니,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깨를 쫙 펴세요.

그리고 주먹을 불끈쥐고 힘을 냅시다! 우리에겐 총칼보다 무서운 탐라혼을 간직한 정의의 동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적은 ‘불의’이지 총칼이 아닙니다. 총칼로서도 굴복시킬 수 없는 민의(民意)라는 이름의 동지들이 우리의 곁에 겹겹으로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네들도 모를리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당면과제는 이 땅에 하나도 남김없이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을 소탕하는 일입니다. 제2 제3의 무장군경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 구실을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다 해서 우리는 주저앉거나 뒷걸음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민의의 선전포고는 이미 해 놓고 있는 셈 아닙니까?

설마가 사람잡는다고는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던 민주군대가 두 번 다시 민의앞에 총부리 겨누는 과오를 되풀이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다해서 방심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지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친일파-그자들은 찰거머리로 둔갑해서 양코배기들의 가려운 데 긁어주며 구워삶기 작전을 쓸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 얘기는 이것으로 줄이고, 고정관위원장님의 값진 한 말씀 후배들에게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서병천의 불을 뿜는 장광설은 오랜만에 끝을 맺고 배턴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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