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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흔히 ‘정치’와 ‘선거’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고, 선거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공직에 임할 사람을 투표로 뽑는 일로 엄연히 성격이 다르다.
물론 정치는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고 정당의 목적은 선거 승리를 통해 정권을 획득·유지하는 것이니만큼 정치와 선거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선거가 과정이라면 정치는 목적인 셈이다.
따라서 선거에선 무조건 상대를 이겨야 하지만, 정치는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니만큼 이기는 게 절대 선(善)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되레 양보하고 한발 물러서는 게 선(善)일 수도 있다.
이런 사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이번 주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공식 회담을 앞두고 한 후보 측 박정하 당 대표 비서실장이 ‘여야대표 회담 생중계’를 제안했다는 황당한 소식 때문이다.
여야대표 간 TV토론이라면 몰라도 회담을 생중계하자는 건 일단 상식적이지도 않거니와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건 너무나 뻔하다.
세간에 “정치회담과 소시지 만드는 공장은 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회담에서는 공개하지 못할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회담은 그래야 한다,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하자는 건데 그걸 공개하자고?
그러면 이재명 대표나 한동훈 대표 모두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가 없다. 특히 지지자들에게 자신이 물러서지 않는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거친 언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회담할 때 이 대표가 느닷없이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마치 ‘선전포고’ 하듯 15분간이나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그런 연유다.
그 결과 모처럼 마련된 영수회담 자리였지만, 이 대표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 국민에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싸움꾼이라는 부정적인 인식만 심어주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여야대표 회담을 생중계한다면 양측 모두 자신의 지지자들을 의식해 한발도 물러설 수가 없다. 그런 장면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협상은 내가 원하는 것만 얻을 수는 없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조금은 내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조율해 나가는 게 바로 정치다.
특히 178석의 거대한 의석을 지닌 야당 대표를 상대로 하는 협상이다. 국회에서 입법 독재를 하는 그런 당의 대표를 상대로 한동훈 대표가 하나를 얻고 하나를 양보하는 식으로 5대5의 결과만 얻어도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지금은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이 횡포를 부리고 있는데 그걸 절반만 막아내도 한 대표는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회담을 생중계해서 그럴 기회마저 날려 버리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 대표는 단순히 기회만 날려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일극 체제의 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가 모든 권한을 쥐고 회담에 나오지만, 한동훈 대표는 아직 그럴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선 한 대표가 회담의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
가령 어떤 정책에 대해 두 사람이 논의할 때 이재명 대표는 자신의 발언이 곧 민주당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한 대표는 그럴 입장이 못 된다. 당내에선 추경호 원내대표와 논의해야 하고 나아가 당정 간의 논의도 거쳐야 한다. 어떤 정책을 논의하든 자신이 결정권자인 것처럼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이 민주적이지만 대표 회담에선 발목 잡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중계가 한 대표에게는 그리 유리한 상황도 아니다.
그러니 한 대표는 그런 방식 따위는 안중에 두지 말고 의제에 집중하기 바란다.
어차피 이재명 대표는 정치생명이 그리 오래 남은 사람도 아니다. 조만간 유죄 판결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일극 체제의 아성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말싸움에서 이긴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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