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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고하승
국민이 뿔났다.
당연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이 이른바 ‘최순실게이트’라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되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는 다섯 차례의 촛불시위는 바로 그런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대국민 담화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또 한 번의 실망을 안겨준 담화인 셈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불거진 의혹들에 대해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았다”는 등 변명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한 부분은 단지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검찰의 수사 결과와 배치되는 것이다. 검찰은 최순실·안종범·정호성 등을 재판에 넘기면서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해 피의자로 입건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박 대통령을 향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내려오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극단적 분노로 인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국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는 달라야 한다.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난 군중 앞에서 돌팔매 맞을 각오를 하고, 합리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한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즉각 퇴진할 경우, 이른바 ‘박근혜 복심(腹心)’이라 불리는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는 끔직한 결과가 초래된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박근혜정부가 그대로 연장되는 셈이다.
따라서 국회에서 먼저 현재의 국정혼란을 수습할만한 유능한 총리를 추천하고, 박 대통령 퇴진 시 그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누구하나 나서서 국민들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 야권 대선주자들은 이런 사태를 악용해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오직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는 박 대통령의 담화에 대해 “이번 담화에서도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책임자로서 참회와 반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국회에 모든 결정을 넘기겠다는 제안도 즉각 퇴진을 바라는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만시지탄”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야3당이 임기단축을 포함해 모든 결정을 국회에 넘기겠다는 대통령의 제안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일단 야당 지도부가 만나서 거국내각을 준비하고 여당과 협의해야 한다. 여야 제 정당은 대통령의 제안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수인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중지하라는 건 아니다.
실제 손 전 대표는 “탄핵은 예정대로 추진하되 탄핵 이전에 거국내각이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진실규명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특검과 국정조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대통령을 포함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후대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번 사태를 대하는 모든 정치인들 발언 가운데 이처럼 균형 잡힌 발언을 본 적이 없다.
대통령에 대해 탄핵은 탄핵대로 추진하되, 사실상 박근혜정부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인 황교안 총리의 대행체제 출범을 막을 수 있는 이런 방안은 사실 국민들이 가장 원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사실이 각 언론을 통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사 대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게 여야 유력대권주자들을 향해 사실상 줄서기에 들어간 까닭이다. 실제 ‘제3지대’를 표방하고 있는 손 전 대표의 이런 발언을 대서특필하거나 옹호했다간 유력주자의 눈 밖에 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도의 흥분상태인 탄핵정국이 끝나고, 국민이 다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을 때, 특히 ‘황교안 대행체제’가 국정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국민은 손학규 전 대표의 발언을 되새기며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치권은 박 대통령 퇴진 시 황교안 대행체제의 출범을 저지할 유능한 총리를 추천하고, 그 총리가 거국내각을 구성해 국정혼란을 수습할 수 있도록 당장 논의를 시작해 주기 바란다. 내년 대통령 선거의 유.불리를 따지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렇지 않고 지금과 같은 사태를 수수방관할 경우, 지금 대통령을 향한 촛불시위가 나중에는 여야 정치권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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