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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줄곧 호헌(護憲)을 주장해왔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018년 6월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언론사의 편집국장이라는 위치에서 이런 표현하기가 좀 뭐하지만, 이 제안을 보고 너무 웃겨서 배꼽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적성한 이른바 ‘문재인을 위한 개헌저지보고서’라는 게 언론에 보도된 뒤여서 그 ‘꼼수’가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내용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정치권과 국민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라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와 같은 ‘권력분산형’ 개헌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제왕적대통령 체제에선 권력형 비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대통령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씨와 월계수회를 두고 말이 많았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차남 김현철씨가 ‘소통령(小統領)’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국정에 개입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의 세 아들(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문제를 일으켜 ‘홍삼트리오’라는 소리까지 나왔었다. 민변 출신 노무현 대통령도 박연차 게이트와 형 ‘봉화대군’의 수뢰사건으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이명박 정권 때에는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이 ‘만사형통(萬事兄通)’ 소리를 들었다. 급기야 현 정권에 이르러서는 ‘최순실게이트’라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제왕적 대통령제를 권력분산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게 정치권의 요구이고, 국민의 바람이다. 그런데 보고서는 분권형 개헌을 방해하기 위해 대통령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의원들을 개헌특위에 참여하는 방안을 권하고 있다. 실제 보고서는 국회개헌특위 구성과 관련해 “4년 중임제에 긍정적이거나 비슷한 입장을 가진 의원을 다수 참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제왕적대통령제를 선호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위한 전략으로 “적극적 개헌론자나 이원집정부제 주장자의 특위 참여를 소폭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마디로 개헌을 하더라도 권력이 분산되는 방향이 아니라 제왕적대통령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4년 중임제로 가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분권형도 논의하는 것처럼 보이겠다는 것이다. 즉 ‘꼼수’를 부리겠다는 말이다.
더욱 큰 문제는 보고서에 “현실적으로 대선 후 개헌을 약속한다 해도 대선 뒤의 경제 위기나 각종 현안으로 개헌 추진이 동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이는 개헌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해도 실제 이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뜻으로, 어차피 개헌은 지킬 수 없는 ‘공약(空約)’이 되는 것인 만큼 개헌을 ‘공약(公約)’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개헌을 ‘공약(公約)’한 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경제위기 등을 이유로 백지화시키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보고서가 나온 후에 줄곧 호헌(護憲)을 주장해왔던 문재인 전 대표가 느닷없이 ‘2018년 6월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블랙홀’이라며 개헌논의 자체를 차단했던 것처럼 ‘경제위기’를 이유로 논의자체를 막을 것이 불 보듯 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고서에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지 않는가.
사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뒤집은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장 지난 4.13 총선 당시 호남민심을 얻지 못하면 정계를 은퇴하고 대선에도 나오지 않겠다고 공식선언했었지만, 호남에서 대참패했음에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마 개헌 약속 역시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문 전 대표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정말 국민을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걸 굳이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미룰 이유가 무엇인가.
이미 지난 18대 국회와 19대 국회에서 개헌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개헌은 40일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미루자는 것은 개헌을 안 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어떤 얼빠진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지금 체제에서 갖고 있는 제왕적 권한을 내려놓겠다고 하겠느냐"고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는 “손학규 전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내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방안을 제안했었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 같은 호헌파들의 반대 때문에 차선책으로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만일 문 전 대표가 호헌주장을 철회하고 개헌에 동참한다면, 그리고 개헌논의에 진정성이 있다면 굳이 그 때까지 국민에게 ‘제왕적대통령제’가 연장되는 고통을 인내하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문재인 전 대표의 모습과 최순실씨가 적어준 그대로 연설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더니 친박이든 친문이든, 패권세력은 어쩔 수 없이 닮은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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