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구리소년 사건은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 와룡산 근처에 거주하는 5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유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 반면,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팀은 감정 결과 ‘명백한 타살’이라고 결론 내렸으나 무슨 흉기나 어떤 방법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까지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대통령까지 나서 사건해결을 독려했지만 1,500여명에 달하는 용의자 신고(조사) 등 ‘많은 설(說)만 남긴 채’ 개구리소년실종사건은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이 미제사건과 관련 한국형 탐정학술의 메카이자 허브로서의 역할에 진력하고 있는 한국민간조사학술연구소(kpisl, 소장 김종식)는 ‘죄없이 죽어간 소년들과 유족들의 한(恨)을 풀어 주는 일’에 일조하겠다는 일념 하에 40여년 간에 걸쳐 토대를 일군 ‘탐정학술’에 기초하여 2019년부터 ‘11명으로 구성된 부설 연구팀’을 꾸려 ‘개구리소년사건의 발단과 사인, 범인 등’을 유추하는 수십가지 가닥의 ‘상상’과 ‘추리’를 연역(演繹)하거나 귀납(歸納)하는 등의 탐구를 거듭해 온 끝에 최근 ‘개구리소년들은 분노조절장애자의 우발적 범행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단(推斷)하는 세 가지 가설(假說)을 설정(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민간조사학술연구소는 이번에 내놓은 ‘분노조절장애자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라는 가설을 정립하기 위해 개구리소년사건 발생 당시(1991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등 ‘현대범죄의 병질성(病疾性)과 우발성·흉폭성’ 등을 이 사건 해석에 깊이 응용하였으며, 논거가 모호한 ‘한낱 얘깃거리나 망상’과의 차별화를 위해 ‘유의미한 방증(傍證)’이 전제되지 않은 ‘막연한 추측’은 철저히 배척했다.
또한 법률 및 수사·정보 전문가그룹(이인기 변호사·전 국회행정안전위원장·3선, 박진우 경찰공제회 이사장·전 경찰청 차장·전 경남지방경찰청장·전 경찰청 수사국장, 박종구 전 tbs 서울방송대표·전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관리부장 등)의 자문에 깊이 귀 기울인 등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특단의 노력’을 기했다는 점에서 금번의 가설은 개구리소년사건을 처음부터 새롭게 들여다보게 하는 소중한 단초가 되리라 확신한다.
[가설 1 – 사건의 발단·살해 도구와 방법 등]
사건 당일 개구리소년 5명은 산길(山中)에서 일체불상의 남자 1명(청년)과 우연히 조우하여 같은 방향으로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산행 중) 누군가 산길 옆 숲속에 버려져(?) 있던 ‘권총과 실탄이 든 가방(또는 야전삽 등 등산용품이 든 가방)’을 우연히 발견하고 ‘00이다’ 소리치자 소년들은 ‘우~와’라며 이에 접근했을 것이다. 이때 일체불상의 남자와 개구리소년들 간에 서로 ‘우리(내)가 먼저 발견했다, 내(우리)가 가져야 한다’로 시작하여 심한 말다툼과 비아냥이 오갔을 것으로 추리된다(이를 방증할 유의미한 자료 있음).
이 언쟁에서 나름 민망스러움과 화를 참지 못한 불상의 남자(분노조절장애자?)는 소년들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작심, 비교적 노출이 적은 한적한 곳으로 유인한 후 자신에게 가장 저항이 심했던 禹군(당시 13세)부터 습득물인 ‘권총(?) 또는 야전삽(?)’ 등으로 머리 부위를 집중 강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권총 1발을 머리에 대고 발사한 것으로 추단되는 방증 있음), 그 다음 곁에서 겁에 질려 있던 소년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옷을 반쯤 벗기거나 옷으로 손발을 묶은 뒤 야전삽(?) 등을 이용하여 순차적으로 살해한 후 주변 구덩이에 밀어넣고 돌로 눌러 두었을 것으로 보는 가설이다(이를 뒷받침할 신빙성있는 탐구 결과 있음).
특히 습득물(?)이자 말다툼의 대상이 된 권총(?) 등이 즉석 살해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소년들을 살해한 행위 그 자체는 일응 ‘우발적 범행’인 것으로 추정되며, 유골 발굴 시 암매장터에서 발견된 총알(탄두 6종, 145발)은 ‘소년들을 살해 후 권총은 범인(자신)이 갖고, 총알은 살해된 소년들을 향해 내던져진 것(내버려진 것)일 개연성’이 높다(이러한 정황을 유추할 방증 있음).
[가설 2 – 범인의 윤곽 및 당시 ‘허술한 수사로 면제부(?)’ 받았을 가능성과 재범 가능성 등]
위와 같은 가설에 따를 때 개구리 소년들이 산행 중 우연히 만난 일체불상의 남자는 어디에 사는 누구일까? 일체불상 남자의 얼굴이나 말씨, 말투, 옷차림새(등산복 등에 새겨진 마크나 글자) 등을 통해 아이들이 일견 알아 볼만한 현지인(향토인)이었더라면 소년들이 심한 언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등으로 보아 불상의 남자는 대구·경북권 말씨를 쓰지 않는 먼 외지인(전라도 또는 충청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사건발생지(와룡산)에는 와룡산을 생업의 근거지로 삼거나 와룡산과 연접한 이웃산으로 가기 위해 지나다니던 ‘(일명)산지기’, ‘산역(山役)종사자’, ‘약초채집꾼’ 등 외지인들이 등산용 지팡이나 작업용 도구 등을 소지하고 심심찮게 드나들었다는 등의 정황으로 보아 다른 용의자 그룹에 비해 이들 ‘산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은 외지인 그룹’ 속에 범인이 있을 확률이 99%에 가깝다는 설이 조심스럽게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이를 뒷받침할 방증 있음).
하지만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가 8차 용의선상에서 묘하게 빠져나갔듯(빠졌듯?) 개구리소년 살해범 역시 ‘본건(本件)’ 또는 ‘별건(別件)’ 등으로 한두 차례 조사 대상은 되었으나 ‘허술한 수사로 면죄부(?)’를 받고 지금은 버젓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범인이 심한 ‘분노조절장애자’였다면 1991년 3월 개구리소년 사건 발생 후에도 어디서건 유사한 살상 등 중범죄를 연이어 더 자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측면(미국의 힉키 교수의 견해 등)에서 볼 때 유사한 ‘실종(증발)사건’이나 ‘의문사 사건’ 등에 대한 재조사 또는 공조수사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범인’ 한두 차례 조사받고 용의선상에서 벗어나 있을 개연성을 시사하는 정황 자료 있음).
[가설 3 - ‘소년들 암매장터를 문화일보에 제보한 까닭과 그의 정체는?]
‘개구리소년이 와룡산에 한꺼번에 묻혀 있다’고 2002년 9월 25일 문화일보 편집국에 최초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정모(40,가명일 것으로 추단되는 자료 있음)씨는 ‘범인들에 대해 들은 얘기를 진술하겠다’며 ‘개구리소년들은 6공 정권 당시 강경대·김기설 사건 등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정권차원에서 살해한 것’이라 진술(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2002년 09월 30일 문화일보). 하지만 당시 정모씨의 제보 상황이나 그의 신원 등을 석명(釋明)한 후속 취재나 보도는 없었으며, 경찰의 제보자에 대한 신원 파악 결과도 제보자 보호라는 원론적 측면에서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이로 제보자 정모씨는 문화일보에 불쑥 전화 한번(면담 한번)하고 연기처럼 사라진 셈이다.
제보자인 듯, 범인인 듯 그의 ‘신출귀몰(神出鬼沒)’이 남긴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6공이 정권차원에서 살해했다’는 생뚱맞은 제보는 수사의 방침과 방향에 혼선을 주기 위한 간계(奸計)로 보이며, 둘째, ‘범인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범인들에 대해 들은 얘기를 진술하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신원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유언비어(루머) 제보’ 수준으로 수사기관이나 언론에 부담없이 접근하여 수사의 초점을 간파해 보려는 술책(術策)이였을 것으로 풀이 된다. 셋째, 제보자(용의자?)가 파급력이 큰 메이저 신문사들을 제쳐두고 당시 인지도가 비교적 미미했던 석간 문화일보를 ‘개구리소년 암매장지’ 제보처로 택한 것은 대형언론사에 제보할 경우 심층 취재나 그들의 정보력에 되레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거나 역취재 당할 것을 우려했던 방책(方策)으로 보인다.
이후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직관(直觀)과 경험칙(經驗則)을 중시하는 ‘탐정학술전문가’들은 그 제보자(40세 안팎으로 추정되는 자칭 정모씨)가 바로 개구리소년들을 살해한 범인(즉, 가설1 및 가설2에 등장하는 일체불상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그 정모씨의 정체와 행적을 추정케 하는 유의미한 방증 있음).
[가설 4 - 위의 세가지 가설을 전제로 하는 제4의 가설인 ‘범인을 검거할 기회 세번 놓쳤다’는 추후 공개 예정]
모든 사건의 해결은 가설로부터 시작된다. 가설이 일정한 검증을 거치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즉, 가설은 진실로 향하는 대체적인 줄거리라는 애기다.누구든 허구의 가설을 만들어서도 안되지만, 합당하게 정립된 가설을 우습게 여겨서는 더더욱 안된다. ‘한국민간조사학술연구소 개구리소년사건 연구팀(탐정학술지도사·실종자소재분석사 등 사설탐정 11명)’은 가설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에 입각하여 ‘앞(前)의 가설을 뒤(後)의 가설로 허물거나 뒷받침’하는 등의 ‘신탐정기법(新探偵技法)’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는 ‘사실관계 파악’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필자/김종식
한국민간조사학술연구소장,한국사회안전범죄정보학회탐정학술위원장,前경찰청치안정책평가위원,한북신문논설위원,치안정보·수사25년(1999,경감),경찰학개론강의10년/저서:탐정실무총람,탐정학술요론,탐정학술편람,민간조사학·탐정학,경찰학개론,정보론,경호학,공인탐정법(공인탐정)의 명암과 각국의 탐정업(민간조사업)과 탐정법 비교론外/탐정제도·치안·국민안전분야 500여편의 칼럼이 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