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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나라 같지 않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촛불집회에 다섯 차례 참석했다. 지금 기억으로 내가 참석한 날은 유달리 추웠다. 추위에 떠는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추운 날은 손님이 덜 오는 날이라서 한결 부담이 덜했으나 집회에 참석하고 공백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손님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한심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부랴부랴 가게에 도착했다. 바짝 긴장한 나는 꽉 찬 손님의 부름을 받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여유조차 없던 아내의 삼일 굶은 시어머니 눈을 피해 다니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나뿐 아니라 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엄동설한에 촛불을 들었던 것은 무능한 박근혜 정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지 그 자리에 꼭 문재인을 앉히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재인은 시부저기 대한민국 옥새를 거머쥐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쉽게.
그들도 그랬고 대부분의 시민들도 문재인 정부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촛불정부라고 부르는 것에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내 친구 ‘고원’ 정치학 박사는 자신의 저서 <촛불 이후>에서 촛불 혁명이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라고 예찬까지 했는데 시민혁명으로 세워진 정부라고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시계 건전지 하나를 갈아 끼우는 시간이면 족했다.
재주꾼은 재주꾼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그야말로 다시는 경험해서는 안 되는 나라를 만들었으니. 말하자면 양고기를 판다면서 개고기를 판 꼴이다. 공정, 평등 정의는 정권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데 필요한 수사였다. 잔치를 하다 보면 그릇이 좀 깨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좀’이 아니라 곳곳에서 와장창 소리가 난다.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다짐도 정치적 수사였다. 군주가 태양이라면 그 태양의 빛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쬐어야 하는데 특정 세력에게만 몰아서 내리쬐었다.
그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이름만 청사에 길이 빛나고 전투를 하다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혁명의 과실은 그들만의 몫이었다. 한겨울 화롯불에 오손 모여 도손 고구마 구워 먹듯 전 정권과 다름없이 끼리끼리 나누어먹었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편협한 인사뿐이었다. 야당이 반대하는 인사는 오기로 임명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나 있는 풀을 보면 그 땅이 어떤 땅인지를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그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야당이 임명을 반대한 35명의 면면을 보면 문재인 정권 모든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이 내세웠던 5대 인사 철학은 한 번도 제대로 이행해 본 적이 없다. 태양에도 흑점이 있듯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 어디서 골라오는지 일부러 흠이 많은 사람을 골라오는 재주를 보여주곤 했다. 흠이 없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성추행 등 자신들의 과오로 치러지는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다. 필요하면 약속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법을 이용한 통치에 180석은 안성맞춤이었다. 수틀리면 법을 만들어 입을 막고 주리를 틀려 했다. 윤석열 대선출마를 막기 위한 법 제정 공갈은 화룡점정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이너서클은 자기 확신으로 지난 4년을 보내왔다. 진보를 참칭하는 모든 사람이나 조직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자기 확신은 배타주의의 발원이다. 고집이 소신이 되는 시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위정자들 사이에서의 자기 확신은 대단히 위험한 사고다. 판단의 오류는 국가와 국민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4년 아니 5년을 살얼음판에서 살았고 살고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기득권의 아랫목에 앉아있다. 깃발이 완장으로 변해 그 완장을 권권拳拳(무엇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형세)하기 위해 과거의 기득권보다 더욱 치열하게 반항하고 있다.
그들에게 180석은 끓는 냄비였다. 끓는 냄비 속에서 죽는지 모르고 까불다가 지난 보궐선거에서 철퇴를 맞았다.
뱀은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게 되고 나무는 하루라도 자라지 않으면 죽는다. 집권당이 한계에 봉착한 원인은 간단하다. 혁신을 거부했고, 아니 반항했고 기득권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민혁명의 대의는 발길질 당했다. 그 옛날 최루탄 연기 자욱한 광장에서 매섭게 날아오는 곤봉에 비굴하지 않던 결기는 사라졌고 그 시절이 훈장이 되어 오직 보상을 지키는데 급급함만 남았다.
공자는 군대, 식량, 믿음을 정치의 요체로 정의했는데 이 중에서 군대와 식량은 버릴 수 있어도 믿음은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설수 없기에 믿음을 중히 여겼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조국사태 때문만이 아니다. 윤석열 핍박 때문만도 아니다. 윤미향 때문도, 부동산 때문도, 고집스러운 편협한 인사 때문도 아니다. 거짓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뢰는 돈 몇 푼 쥐여준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안타깝다는 말도 아까운 표현이지만 신뢰를 회복할 시간은 다 지나갔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야당에서 불고 있는 이준석 바람도 문재인 정권과 무관치 않다. 야당 내부적 문제도 있지만 여당이 자행한 정치 불신, 즉 보복심리가 이준석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새파랗게 젊은 야당 대표와 영수 회담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자업자득이다.
요컨대 이런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그 많은 시민들이 추위에 고생했나 싶다.
그들은 촛불혁명을 철저히 이용했고 혁명은 그들에게 유린당했다.
결국 죽 쑤어 개 준 셈이다. 이제 그 죽그릇을 차버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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