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추하면서 아름다운 60세 소녀의 슬픈 여정

차재호 / / 기사승인 : 2010-05-03 16: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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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사실주의’ 이상과의 부자연스런 조화 더 서글퍼 시는 현실을 담는다. 때로는 이상도 끌어들인다. 너무 리얼해 외면하고 싶기도 하고, 꿈속을 거닐듯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경우도 있다.

이창동(56) 감독의 신작 ‘시’는 현실과 이상 간 거리를 더욱 좁혔다.

순수한 소녀같은 마음을 지닌 60대 할머니 미자(윤정희·66)는 동네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면서 세상의 이면을 알아간다. 간병인으로 일하며 손자를 홀로 힘들게 키우는 노파이지만 길가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에 감동하고 꽃장식 옷을 좋아하는 멋쟁이다. 그녀에게 세상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그러다 ‘현실’과 맞닥뜨린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손자는 성폭행으로 인한 여중생 자살사건에 연루된다.

미자는 번뇌와 고통에 휩싸인다. 그래도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피해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 하는 미자이지만, 길에 떨어진 살구의 아름다움에서 시의 영감을 얻는다.

그러다 조금씩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간병하는 노인이 ‘남자구실을 한 번 하고 싶다’고 하자 일단 뿌리친다. 얼마 후 손자의 합의금을 구하기 위해 그와 밋밋한 성관계를 감행한다. 성폭행의 충격으로 자살한 소녀, 가해자의 할머니는 몸을 ‘팔며’ 현실과 타협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부자연스런 조화가 서글퍼서 더 사실적이다. 이렇게 미자는 자신 만의 시를 완성해간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미자의 여정을 기록한 ‘시’는 추하고 아름답다.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발표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고 슬펐던 시간이 사실은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라고 전한다. 이런 깨달음은 죽은 여학생의 세례명을 따서 지은 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에고스란히 배어있다.

이 감독은 그러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주가 아니라고 한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오히려 관객에게 내가 묻고 싶고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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