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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문 변호사 |
그러던 참에 원숭이들은 반짝 반짝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보게 되었다. 원숭이들은 그것이 불씨라고 생각하고 장작을 모아다 그 위에 반딧불이를 얹어 놓고 열심히 불었다. 얼른 불이 타올라서 몸을 녹일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새 한마리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 새는 원숭이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원숭이 여러분! 공연히 애쓰지 마세요. 당신들이 본 것은 불씨가 아니에요!'
하지만 원숭이들은 들은 체도 안했다. 그러자 그 새는 원숭이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나가던 행인이 그 새의 결심을 알아차리고, 충고했다. '새야! 바로 잡을 수 없는 일을 바로 잡으려고 무리하게 애쓰지 말라. 무릇 잘라지지 않는 단단한 돌에는 애당초 칼을 대지 말아야 하고, 휘어지지 않는 나무로는 아예 활을 만들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그러자 그 새는 행인의 말을 듣지 않고서 기어이 원숭이들에게 다가가 반딧불이가 불씨가 아님을 알렸다.
그 순간 새의 잔소리를 성가시게 여긴 몇몇 원숭이들이 새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죽였다. 새의 충고는 원숭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충고였다. 하지만 원숭이들의 무모함은 결국 간절하게 충고하려던 새를 죽음으로 내 몰았다. 그새 역시 결국 행인의 충고를 무시했다. 충고를 무시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무참해진다.
14대 총선 때였다. 공천발표 하루 전날까지 공천자 명단에는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조간신문에 발표된 공천자 명단에는 없었다. 낙천된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낙천자 신세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날의 결기는 대단했다. 당시 주변에서 무소속 출마를 말리는 충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충고를 무시햇다. 그리고 마침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결과는 상대방 당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오늘의 선거판을 보면 여전히 중앙의 공천권자들은 원숭이 무리와 다를 바 없다. 당선가능성이 있는 불씨를 찾는다. 총선이든, 지방선거이든, 아니면 보궐선거이든 마찬가지이다. 원숭이들의 놀음과 같은 것이다. 불씨와 비슷한 반딧불이를 찾으려는 실세들의 개입도 여전하다. 이러한 원숭이들의 놀음에 대하여 충고를 하려는 새들이 많다. 오늘의 각종 언론들이 새와 같다. 그들은 한결같이 충고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측근을 공천자로 내세우는 악습을 고치라고 말이다. 새들은 이야기한다. ‘선당후사’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원숭이같은 인사들은 선당후사가 아닌 ‘선 측근 후당’이 먼저다. 당선유력인사라는 불씨를 찾고 싶어 하고, 당선유력인사를 반딧불이로 착각한다. 그래서 당선가능성이 없으면 그 지역에서 고생해온 당협 위원장이라는 불씨는 하루아침에 파리 목숨처럼 꺼버린다.
정치의 원칙과 신뢰가 사라져가고 있다. 보선이 아닌 일반 총선을 대비해, 비록 낙선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중앙정치 무대에서 보면 무게감이 떨어지는 후보라고 하더라도, 지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고생해온 후보들의 경우, 그들을 불씨로 살려야 한다.
전략공천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씨 소멸수단이다. 파리 목숨과도 같이 불씨들은 날아간다. 이것이 전략공천의 폐해이다. 오직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사람 심기나 당선가능성만이 반딧불이처럼 보이는 것이다.
김문수 전 지사에 대한 동작을 전략공천 보도도 예외는 아니다. 결국은 나경원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나경원은 반딧불이일까? 불씨일까?
야당의 동작을 공천도 마찬가지이다. 허동준이라는 불씨는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그런데 이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쓴 소리를 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소귀에 경 읽기 수준이다. 여기에 여의도 불판을 갈아보자는 노회찬이 나섰다. 결과는 이미 국민들이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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