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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
그가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으로 민족 분단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과연 이승만 개인의 독단적 결과물인가. 1948년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른 5·10 선거의 투표율은 95%를 넘었다. 남한 주민 절대 다수의 정치적 결단과 국제사회의 공인으로 세워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서 공산화 교육을 받은 김일성 소련군 대위는 광복 직후부터 공산정권 수립에 몰두한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결성, 3월 토지개혁, 11월 인민위원회 대의원 총선거, 1947년 2월 인민위원회 수립, 12월 북조선 중앙은행권 발행,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4월 북조선 헌법 초안 발표…. 명백한 독립국가의 주권 행사다.독자적인 군대와 통치체제의 실질을 갖추고 남한보다 훨씬 먼저 사실상의 정부(de facto government)를 이끌던 김일성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기다렸다는 듯 20여일 뒤에 북한 단독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다.
그 20여일의 차이로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떠넘기려는 속셈이지만, 제아무리 민족의 태양이라 한들 불과 20여일 만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허튼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광복 조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며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시’라는 유엔 총회 결의를 거부한 스탈린과 김일성은 일찌감치 분단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친일 의혹을 받는 인사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것도 통탄할 노릇이다.
그러나 당시는 나랏일을 맡길만한 실무경험자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악질적 매국노가 아니라면 우선 실무능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에 복무한 장병들을 그 경위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숙청했더라면 6·25 전쟁을 그만큼이나마 치러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김일성의 친일파 숙청이라는 것도 이승만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이 된 그의 외종조부 강양욱은 일제의 도의원, 부주석을 지낸 동생 김영주는 일본 헌병 보조원이었다. 중추원 참의가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가 문화선전성 부부상, 일제의 함흥 철도국장이 인민위원회 교통국장으로 기용됐다.
초대 공군사령관과 9사단장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었다.이승만은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강력히 요구한다. 1952년 1월 독도를 우리 관할 아래 두는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듬해에는 해양경찰대를 창설한다.
그 후 해경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에 총격을 가해 일본인 어부 3900여 명을 나포했다. 이승만의 정책은 결코 친일이 아니었다. 철저한 반일(反日)이었다.이승만을 국부(國父)라 부르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왕조시대 냄새가 나는 구년묵이 용어다.
부족연합체였던 이스라엘이 왕국을 세우려할 때 선지자 사무엘은 “왕의 종이 되려는가”라고 꾸짖었다. 권력의 마성(魔性)을 꿰뚫어본 통찰이다. 국부는 초인도 아니고 성인(聖人)도 아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세상의 어떤 국부도 권력의 마성에 초연(超然)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이승만도 예외가 아니었다.“이 싸움(남북전쟁)에서 나의 최대 목적은 연방을 살리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백인과 흑인이 함께 살아야 한다면 반드시 백인종의 우월권을 유지해야 한다.” 인종주의자의 발언처럼 들리는가.
놀랍게도, 흑인노예 해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링컨의 말이다(제임스 콘, <흑인신학과 흑인의 힘> 중). 링컨은 전쟁 반대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수천 명의 비판적 언론인을 영장 없이 체포했을 뿐 아니라 300여 신문사의 문을 닫았다.
그래서 미국 국민이 그를 독재자라고,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는가. 링컨 기념관의 동상을 끌어내렸는가. 링컨은 세계 역사에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있다.
이승만이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절대왕정과 식민지배의 경험밖에 없었던 이 땅에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전쟁까지 치르며 공산주의와 싸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부정선거나 사사오입 개헌 등 반민주적 과오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4·19 의거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친일파로, 분단의 원흉으로 부르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8·15 해방 공간의 무정부상태에서 거대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에 맞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이승만의 건국 노선은 오늘의 자유와 번영이 싹트는 토양이 됐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조국의 건국사를 가르치지 않는 자기모멸의 나라, 건국 대통령의 묘역을 무슨 혐오시설 피하듯 외면하는 음습한 도그마의 그늘, 6·25 전범의 시신에 참배한 밀입북자가 예절바른 사람으로 둔갑하는 괴이쩍은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지난 7일, 북한은 김일성 20주기를 맞아 성대한 추모행사를 열었다. 오는 19일, 우남의 49주기는 냉랭한 무관심 속에 또 쓸쓸히 지나갈 것이다. 역사의 영욕(榮辱)이 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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