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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
물론 이정현 새누리당 신임 대표(이하 이정현)는 욕을 먹어도 싼 잘못을 수없이 많이 저질러왔다.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탄생한 전두환 독재정권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당직자로 정치권에 입문한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치부해도, 그가 대통령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할 당시에 전 국민을 슬픔과 분노에 잠기게 한 세월호 침몰 참사의 보도 방향을 청와대에 유리하게 마사지하려는 목적으로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한 사건은 앞으로 이정현의 정치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박근혜 정권의 국정실패와 새누리당의 총선참패에 커다란 책임이 있는 패권주의적 친박세력이 8‧9 전당대회를 통해 되레 기사회생에 성공함으로써 여권의 진정한 혁신과 과감한 변화를 기대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또다시 실망감과 허탈함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정현의 새누리당 당대표 취임에는 그냥 간단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두 가지 정치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다.
첫째는 망국적 지역구도, 좀 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강고한 영남패권주의에 의미 있는 균열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영남패권주의는 호남 차별과 동전의 양면관계를 이룬다. 영남패권주의의 발원지이자 대본영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새누리당에서 당원들의 손에 의해 사상 최초로 호남 출신 당대표가 뽑혔다는 사실은 호남에 대한 의도적 차별과 조직적 왕따를 지금처럼 계속 지속시켰다가는 정권재창출은 물론이고 국가공동체의 존립마저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이제는 새누리당 안에서도 일각에서나마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뚜렷한 신호라고 하겠다. 청와대의 오더와 친박세력의 집단적 몰표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아무리 평가절하를 시도한들 이정현은 수만 명 당원들이 중지를 모아 선출한 명실상부한 직선제 당대표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야권의 현실을 머리에 떠올리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조차 ‘호남 출신 불가론’을 비록 정략적 계산에서일지언정 결과적으로 폐기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당의 주류는 2002년 방식의 낡고 퇴영적인 “영남후보 필승론‘에 여전히 기대고 있다.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제외하면 야당의 주요한 대선주자들은 거의 모두가 영남권 인사들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같은 경우는 호남 출신은 대권도전 자체가 아예 원천봉쇄되고 있는 정치적 계엄령 상태라고 하겠다.
둘째는 수많은 흙수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다는 점이다. 이정현은 말단직원이라고 할 간사에서 출발해 무려 17계단을 차례로 끈기 있게 뛰어올라 집권당의 당수가 되었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스스로를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도 모자라, 인생 자체에 대한 희망을 접은 N포 세대로 자조하는 데에는 한국사회가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는 성공하고 출세하기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 봉건적 계급사회로 뒷걸음질한 상황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때 계층상승의 사다리로 각광받던 사법고시는 현재 폐지가 예정돼 있다. 그 자리에는 집안에 돈이 있어야만 갈 수 있다는 뜻에서 ‘돈스쿨’이라 비판받는 로스쿨이 떡하니 들어서 있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선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부자이며, 여의도에서는 아버지의 지역구에 손쉽게 무혈입성한 세습의원들의 비중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고, 확실한 자수성가의 방법은 오직 로또 밖에 남지 않았다.
이처럼 사방이 철벽으로 꽉 막힌 신新 신분제 사회에서 이정현은 변변한 학벌과 배경도 없이 무려 17계단을 뛰어올라 당대표가 되었다. 기업에 견주면 비정규직 알바생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격이다. 야당 지지자들은 이정현을 내시라고 비아냥대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환관도 열심히 하면 정승판서가 될 수 있는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적인 세상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알아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거나.
나는 생각이 있는 야당 정치인이라면, 개념이 제대로 박힌 야권 지지자라면 17계단이 아니라 그 두 배인 34계단을 뛰어오른 입지전적 인물을 당대표나 대권후보로 만들 프로젝트에 즉시 착수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한데 실상은 딴판이다. 당장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경선만 봐도 소위 일류대를 나왔거나, 이른바 사자 직업을 가진 전형적인 전통적 엘리트들의 폐쇄적 경연장에 다름 아니다. 밑바닥에서 뒹굴며 몸을 일으킨 흙수저 특유의 대담한 모험심과 발랄한 도전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민족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철천지원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의 조정은 미천한 신분의 자라고 가벼이 여겼다. 그리고 그런 천한 자가 권력자로 있다며 일본까지 덩달아 깔봤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미천한 신분일망정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하는 자를 관백의 지위에까지 오르도록 허락한 역동적 일본에게 양반과 상놈 따지면서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고수하던 정체된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화를 당해야만 했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출생지가 호남이라고 따돌리고, 스펙과 배경이 보잘것없다고 배제하는 그 나물에 그 밥인 보수적 엘리트와 진보적 엘리트들 사이의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그들만의 지루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왕후장상의 씨앗은 따로 없다”고 사자후를 토하며 세상을 확 뜯어고치겠다는 의욕과 기백이 넘쳐흐르는, 시쳇말로 근본 없는 거친 반항아가 주도하는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이다. 태산은 흙을 가리지 않아 태산이 되었고,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아 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새누리당은 흙을 가리지 않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런데 야권은 2002년에 반짝 히트한 영남후보 필승론에 빠져 왜 자꾸만 물을 가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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