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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
'식스 센스(Sixth Sense)'는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놀라운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범인은 브루스 윌리스다'라는 얘기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인간과 영혼의 섬뜩한 커뮤니케이션이 이야기의 전개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는 측면에서 박근혜-최순실 콤비의 국정농단 드라마와 완성도 높은 스릴러 영화인 '식스 센스'는 궤를 같이 한다.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식스 센스'와 달리 박근혜와 최순실이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에는 누가 봐도 범인이 빤하다는 데 있다.
검찰이 발표한 공소장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를 비롯한 여러 국정농단의 주역들과 공모 관계에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박근혜 대통령이 범죄에 가담하기는 했는데, 주범인지 종범인지 아리송하다는 뜻이다. 검찰은 특검수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시점에서까지도 또 다른 반전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싶은 것일까?
피의자 박근혜. 전과 14범이라고 욕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사실 피의자 신분은 별것 아닐 수가 있다. 허나 이명박은 대통령으로 재임 중에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아직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반면에 박근혜 대통령은 현 정부 출범 이래 청와대의 푸들 역할을 충실하게 맡아온 검찰마저도 혐의가 있음을 인정했다. 검찰마저도.
나는 여태껏 정치인 박근혜를 단 하루도 지지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 신세로 전락한 참담한 상황과 막상 마주하니 나까지 창피하고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러려고 우리나라에서 국민 노릇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지해본 적도 없고,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대통령 박근혜는 비루하고 구질구질했어도, 인간 박근혜는 최소한의 자존심은 살아 있었다고 역사책에 기록될 수 있도록 지금이라도 “내가 주범이다”라고 당당히 외쳐 달라. 최순실 패거리가 자행한 전대미문의 헌법유린 사태와 엽기적인 금품갈취 행각의 실질적 주모자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었다고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이실직고해주시라.
나의 이러한 소박한 바람이 현실에서 이뤄질 가능성은 물론 거의 없다. 최후의 순간의 극적인 반전은 오로지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진태씨와 조원진씨 등의 골수 친박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탄핵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려다가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경위들에게 강제로 끌려나오는 그림을 열심히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와 같은 비장한 스펙터클이 여론과 민심의 급격한 반전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꿈꾸고 있을 확률이 크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처음 한번은 비극으로, 나중 한번은 희극으로 되풀이된다고 언명한 바가 있다. 참여정부 최고존엄 탄핵에 반대하다가 끌려 나가는 모습이 매우 비극적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막으려다가 쫓겨나는 광경은 마르크스의 명제를 굳이 빌리지 않아도 대단히 희극적 광경으로 국민들 눈에 비칠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약속한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는 국민들에 더해서 박근혜 대통령 자신에게도 파렴치한 사기극이 되고 말았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역시나 문제는 야당이다. 역풍도 없고, 반발도 없고, 반전은 더더욱 없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야당들은 여전히 몸을 사리고 있다. 필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마자 국회는 곧바로 탄핵발의 절차에 착수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야당들은 박근혜 정권이 던져준 총리 떡밥을 어리석게 덥석 물었다가 귀중한 한 달의 기간을 헛되이 낭비해버렸다. 그 황금 같은 한 달 사이에 새누리당은 친박세력을 외과적으로 절제해낸 다음 재창당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국정공백 사태는 장기화 조짐을 띠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차가운 밤거리에서 몇 주 동안이나 촛불을 계속 든 이후에야 야당은 비로소 대통령 탄핵 카드를 마지못해 꺼내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야당들은 총리가 먼저냐 탄핵이 먼저냐는, 합의 총리로 누가 어울리느냐는 따위의 한가한 신선놀음에 또다시 골몰할 기색을 벌써부터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퇴진 압박 수단인 탄핵을 야당이 실제로 사용할지 몹시 의문시되는 까닭이다.
20대 국회는 이른바 여소야대 국회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관여한 국정문란 사건의 실체와 진상이 알려진 지가 벌써 1개월이 가까워졌음에도 그 많은 야당 의원들 가운데 대통령 탄핵소추서를 작성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거목이 현재의 야당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면 야당 의원들은 앞 다퉈 탄핵소추서를 작성하고서는 누가 더 많이 동료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오는지 치열한 경쟁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의원회관은 동료 의원들의 서명을 받으려는 야당 의원들과, 서명을 방해하려는 대통령 호위무사 금배지들 간의 몸싸움으로 이미 아수라장이 열 번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데 내가 오늘 점심에 짬밥을 먹으러 들어간 국회 분위기는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했다. 이제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적 사법처리를 바라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박 대통령의 사법처리를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면책특권을 지체 없이 박탈해야만 한다. 과연 지금의 국회가, 지금의 야당이 박근혜 대통령이 권좌에서 당장 물러나는 일을 정말 바라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20대 국회는 사상 최악의 사쿠라 국회라는 오명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육감(Sixth Sense)이 자꾸만 나를 스멀스멀 감싸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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