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 소집하라

공희준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16-12-08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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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준 정치컨설턴트
▲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초읽기에 돌입했다. 청와대는 자진 사퇴를 거부하며 갈 데까지 가보자고 선언했다. 장렬하게 옥쇄할 각오 아래 잔존한 친박들, 곧 잔박세력을 부장품 삼아 헌법재판소에다 마지막 저항선을 치겠다는 포석이다. 국회에서 압도적 표 차이로 탄핵을 당할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버티기로 일관하는 중인 대통령의 생사여탈권은 결국 헌재 재판관들이 쥐게 됐고, 국민들은 탄핵소추안의 인용을 촉구하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장엄한 촛불의 물결을 이룰 태세다.

여기까지는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확률 99.9퍼센트의 순도 높은 시나리오다. 그런데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누구나 다 빤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나중에 확인해보려고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과의 즐겁고 오붓한 휴식시간을 반납한 채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차가운 밤거리로 몰려나왔겠는가?

물론 아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군중이 손에 노동을 위한 도구 대신 낫과 몽둥이를, 총과 화염병을, 양초와 LED 촛불을 시대의 변천에 조응해 차례로 바꿔 들고서 거리와 광장에 운집한 건 변화를 이루려는 목적과 동기에서였다. 칼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테제처럼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기성 체제의 낡은 질서를 유지하려는 소수의 지배계급과, 새로운 세상의 출현 즉 후천개벽을 간절히 염원하는 피지배 민중 사이의 싸움이 문명사의 씨줄과 날줄을 직조해왔고, 이와 같은 인류사의 보편적 합법칙성에서는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고 그 자리에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들어서 박근혜 정권이 견지해온 국정운영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간다면 이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는 연유다.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황교안도 박근혜처럼 탄핵하면 된다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비등하다. 나 또한 황교안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즉시 총리직에서 자진 사퇴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통합진보당의 피를 손에 묻힌 황교안이 실효적 측면에서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으로 활동한다는 점은 대한민국이 정당 설립의 기본권적 자유조차 존재하지 않는 영락없는 후진적인 독재국가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허나 박근혜 자르고 황교안 쫓아낸 다음 그곳에 착한 대통령과 착한 총리와 착한 장관들을 들어앉히는 걸로 위대한 2016년 국민혁명이 태산명동서일필 격의 무늬만 대단원의 막을 썰렁하게 내려야 하는 것일까? 아마 이것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수뇌부와 여론조사 지지도 1등이라는 문재인 전 대표 진영에서 내심 기대하고 있을 최상의 결말인지도 모른다. 박근혜의 후속주자로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 입에서 “이제부터 국민 여러분께서는 생업에만 전념하시고…”로 시작되는 또 다른 대국민 담화가 나올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제헌의회, 약칭 CA 사건이 있었다. 제헌의회(Constitutional Assembly)를 소집해 근본적 체제 변혁을 꾀하려는 지하조직이 공안기관에 일망타진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최민과 김성식을 위시한 다수의 학생운동 출신 이론가와 현장 실천가들이 안기부(오늘날의 국가정보원)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 몇 년간 힘들고 쓰라린 옥고를 치르게 된다.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대통령을 하고, 민주정의당이란 전형적인 어용 관제 여당이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어도 국가 자체로서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2010년대의 대한민국과 비교해 더 우수한 문제해결 능력과, 더 풍부한 발전과 성장 가능성을 내포하였다. 제헌의회 그룹이 운동권 내에서 소수파로 머문 데에는 단지 정권의 혹독한 탄압만이 작용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반면에 2016년의 대한민국은 군부독재 시절의 겨울공화국만도 못한 희망 없는 헬조선으로 퇴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박근혜 탄핵하고, 황교안 쫓아내고, 집권당만 새누리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임무교대를 시키자는 것은 연산군 내쫓고 중종 추대하는 반정이나, 서인 조정 물러나고 남인 조정 등장하는 환국 정도에서 소심하게 만족하자는 뜻이다. 국민은 난치병에 걸려 고생하는데 손등 위에 겨우 노란색 대일밴드 한 장 달랑 붙여주고는 “나 나으셨습니다”라고 음흉하고 교활하게 사기 치는 식이다.

대한민국은 아무리 크게, 많이 바뀌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행정부는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등본 발급해주는 말단 공무원까지 깡그리 바뀌어야 하고, 국회는 청소 노동자와 구내식당 배식 노동자 빼고는 그 구성원이 전원 교체되어야 하며, 법원과 검찰은 신규로 임용된 판검사들 포함해 모조리 다시 뽑아야 할 지경이다. 그래야 국민들의 강렬한 변화의 요구에 가까스로 턱걸이로나마 부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감하고 전폭적인 총체적 변화의 선두에는 민의의 전당이자 민심의 집결소인 국회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현재의 20대 국회는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하고 본질적 사유로 말미암아 더 이상 존속해야만 할 명분과 정당성을 치명적으로 상실하였다.

① 박근혜로부터 실질적으로 공천장을 받은 것과 매한가지인 사실상의 유정회 국회의원들이 재적 의원의 3분의 1을 훨씬 뛰어넘는 120명이나 된다는 점

② 야당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는 비민주적이고 인위적인 후보 단일화의 기획물이거나, 여론조사 점수와 모마일 투표로 상징되는 불투명한 경선 과정을 거쳐 금배지를 단 인물들이라는 점

③ 최순실 일당과 김기춘 패거리의 입김 아래 강제 해산된 통합진보당 소속 정치인들의 공민권이 부당하게 제한되고, 이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상태에서 지난 총선이 치러졌다는 점

그러므로 정부만 바꾸고 국회를 그대로 두는 짓은 마치 아기를 돌보면서 엉덩이 사이에 낀 큼지막한 응가 덩어리는 그냥 놔두고 기저귀만 갈아 채우는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개헌이냐, 호헌이냐로 벌써부터 편이 나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와 민심을 삼보일배의 지독히 느린 속도로 힘겹게 뒤따라가는 현존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의 근간을 완전히 갈아엎지 않고서 대증요법으로 고작 헌법만 땜빵으로 손질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헌법 몇 줄 바꾼다고 골병 든 이 나리가 깨끗하게 완치될 리 만무한 탓이다.

국민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처음부터 새롭게 출발한다는 결연한 자세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대한민국을 남김없이 바꾸기를 바란다. 그러자면 새 술을 담을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작금의 20대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과 나란히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순순히, 질서가 있든 없든 무조건 퇴장해야만 한다.

20대 국회 다음에 들어설 국회가 그저 단순한 21대 국회에 불과하다면 우리민족은 미래가 없다. 없어도 아주 없다. 미래로 가려면, 희망을 되찾으려면 우리는 부강하고 민주적인 인구 8천 만의 통일된 자주국가의 출범을 명칭에서도, 기능에서도 성공적으로 준비해나갈 수 있는 명실상부한 제헌의회의 소집이 필수다.

제헌의회 그룹은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한 세대 일찍 나왔을 뿐이다. 학생운동의 ㅎ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나 같은 평범하고 순진무구한 일반 대중마저 그들이 오래전에 외쳤던 구호에 공감이 가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 정치가 “박근혜 즉시 탄핵 VS 질서 있는 퇴진”의 대립으로부터, “현상 유지 대 담대한 변화”의 대결구도로 전선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바뀌기 일보직전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친박이든, 문재인의 친문이든 “지금 이대로!”를 건배하며 기득권에 집착하는 세력은 질주하는 수레바퀴 앞을 막아선 무모한 사마귀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박근혜 탄핵안 가결 직후 거리와 광장의 국민들이 곧장 이렇게 외칠 것이라고 믿는다.

“제헌의회 소집하여 새로운 나라 세우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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