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거버넌스] 서울역사박물관, ‘한티마을 대치동’展 개최

이대우 기자 / nice@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2-12-20 00:20:42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가난의 상징 '쪽박산' 자리에 아파트숲··· '교육 1번지'로 거듭난 대치동의 옛 기억
1963년 이전엔 광주군 언주면··· 1970년대부터 개발 시작
구마을 주민들 기억지도 제작··· 은행나무 제례등 계승도
휘문高 역사자료 중심으로 '강남 8학군' 형성 과정등 조명
▲ 대치동 학원가 풍경.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시민일보 = 이대우 기자] 서울역사박물관은 경기도의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던 대치동이 ‘전국구 교육 1번지’가 되기까지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반세기종합전 <한티마을 대치동>전(展)을 오는 2023년 3월26일까지 개최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 곳곳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가는 ‘서울반세기종합전’을 매년 열고 있다. 올해는 그 열네 번째로, ‘대치동’ 이야기를 선보인다.

경기도 광주군에서 1963년 서울시의 일원이 된 대치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도시화의 길로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에 강북 학교의 강남 이전이 진행되고 ‘강남 8학군’이 형성됐다.

이후 풍부한 교육 수요층을 바탕으로 학원들이 밀집되면서 전국을 대표하는 교육타운으로 변화했다. 본 전시는 박물관의 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 ‘대치동 사교육 1번지’의 성과를 전시로 구현하면서, 대치향우회과 대치동 주민들 그리고 휘문고등학교의 협조를 통해 현장감을 더했다.

전시는 저녁이 되면 학생들의 인파로 넘쳐나는 대치동 학원가의 타임랩스 영상(영상 빨리 돌리기)을 상영하는 도입 부분을 시작으로 총 4부로 구성된다. 4부의 내용과 대표 유물은 다음과 같다.


■ 1부 역사 속의 대치동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서 현재의 강남구 대치동에 이르기까지의 행정구역 변천 과정과 대치동 구마을 ‘한티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 그리고 대치동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며 현재도 계승되고 있는 마을의 고유 풍습인 은행나무 제례가 전시된다.

대치동 일대는 1963년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서울에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彦州面)에 속했다. 언주면은 위로는 한강, 아래로는 양재천 사이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일찍부터 이곳은 왕실의 묘인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조성됐으며 왕실 사찰인 봉은사(奉恩寺)가 건립됐다. 봉은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름다운 풍광은 한양 사람들로 하여금 한강을 건너오게 하고, 시(詩)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 사업으로 과거부터 이어져 오던 아름다운 풍광은 사라졌지만, 개발의 여파 속에서도 대치동 구마을은 원原마을의 공간구조와 옛 시골길의 체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주택 재건축은 진행 중이지만, 대치동 구마을 주민들은 사라져가는 마을의 옛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기억지도를 제작하고, 구마을 사람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은행나무 제례 등 전통 행사를 계승하고 있다.

■ 2부 아파트 숲 대치동


1970년 중후반까지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던 농촌마을 대치동이 탄천과 양재천의 제방공사 이후로 아파트 숲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 보고 대치동 1세대 아파트를 대표하는 은마아파트의 모습과 생활상에 대해 다룬다.

옛 한티마을에는 ‘쪽박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었다. ‘쪽박’은 ‘살림이 거덜나다’라는 의미이다. 잦은 수해를 겪었던 한티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척박한 삶을 산에 투영했다. 하지만 가난의 상징과도 같았던 ‘쪽박산’은 수해를 막기 위한 제방조성공사에 흙을 제공함으로써 지금의 아파트 숲 대치동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쪽박산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대치동 최초의 아파트인 신해청아파트(현 대치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대치동은 은마아파트를 비롯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채워졌다. 이에 발맞춰 급격하게 늘어난 아파트 거주민들의 먹거리와 생필품을 감당하기 위해 아파트 상가의 발전도 이뤄졌다. 현재도 아파트 상가는 대치동 주민들의 일상을 채워주고 있다.

■ 3부 8학군 대치동


1970년대 강북 인구 분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강북 소재 중·고등학교의 강남 이전과 ‘강남 8학군’의 형성과정에 대해 다루며, 대치동의 대표적 8학군 학교인 휘문고등학교의 역사를 교사(校史)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960년대에는 서울의 산업화·도시화로 강북에 도시의 기능이 집중되면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강북 40%, 강남 60%’라는 인구 구조를 목표로 강남 개발 및 인구 분산 정책을 시행했다. 그 유인책으로 당시 높아진 교육열을 고려해 강북의 일부 명문 중·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1990년대까지 휘문고등학교를 비롯한 강북의 여러 학교들이 지속적으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1980년 출신 중학교가 아닌 거주지 기준으로 고등학교를 배정하는 완전학군제가 실시되면서, 오늘날의 소위 ‘강남 8학군’이 탄생하게 된다.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은 자녀를 강남 8학군에 소속된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강남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이러한 움직임은 대치동에 사교육이 활발해지게 된 배경 중 하나가 됐다.

■ 4부 교육타운 대치동

대치동이 전국을 대표하는 교육타운으로 발돋움하게 된 배경과 밀집된 학원가에서 치열한 경쟁의 입시 현장을 살아가는 대치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90년대 형성되기 시작한 대치동 학원가는 주변 지역의 풍부한 교육 수요층을 바탕으로 변화무쌍한 입시제도에 맞춤형 전략을 제공함으로써 빠르게 성장해 갔다. 입시 전형이 다양해질수록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세분화·전문화된 교육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입시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은 교육 서비스를 받기 위해, 학원업 종사자들은 성공을 꿈꾸며 학원가로 모여들었다.

2021년 강남구에 등록된 사설학원은 2383개이다. 이는 서울시 전체 학원 수의 17%에 해당한다. 서울시 자치구 중 학원 비율이 10%가 넘는 곳은 강남구가 유일하며, 이 중 절반 이상의 학원은 대치동에 자리하고 있다. 대치동 학원의 수강생 범위 또한 전국적이므로, 대치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교육타운이라 할 수 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