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우의 인물채집] "런웨이"를 달리고 싶은 모델 정홍자 편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4-04-29 14:36:55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고대 로마 시절,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전승 퍼레이드를 할 때 영웅의 마차 뒷자리에 앉아 시민들의 함성보다 더 큰 소리로 외치는 자가 있었다.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라틴어로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승전하고 돌아온 전쟁영웅의 퍼레이드엔 너무 어색한 멘트 아닌가?

오늘의 영광을 위해 싸웠던 "전사들의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뜻일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영광스런 순간에도 '죽음'을 생각해야만 교만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로마가 그리도 오랫동안 융성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로마인 같은 철학을 가진 한국의 60대를 만났다.

여자다. 정홍자! 그의 현재 직업은 상업(프로) 모델 겸 연기자다.

보통 사람들은 모델 앞에 '시니어'를 붙여서 부르지만, 그녀는 시니어 없이 '모델'로 불리길 원했다.

"저는 나이 먹어서 과거를 회상하다가 어느 날부터 '시니어모델'이 되어야지 하면서 모델이 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나이에는 다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저는 다양한 삶을 살았지만 늘 모델로 살아왔어요. 총학생회장으로 데모할 때도 이 집단의 대표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경기도 도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경기도 대표모델이었고 공기관에서 일 할 때도, 저는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서도 성공하는 집안의 대표모델로 이미 행동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못내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죽음을 생각했었다. 

"이승에선 안 되겠다. 빨리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만 학교에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학교는 다니고 싶은데 아무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귀뜸 해 주셨어요. 서울 가면 야학을 다닐 수 있다고. 그해 추석 서울에서 작은아버지가 오셨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작은아버지 따라 서울로 가서 야간학교를 다니는 게 훨씬 쉽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서울에서도 학교 다니는 길은 너무 멀었다. 

일단 생존비를 벌어야 했다. 지낼 곳이 없는 미성년자가 취업을 해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참으로 아득한 일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전전하던 중 수원에 있는 삼성 계열공장 에 신분도용으로 입사를 했다. 중학교 졸업증명서가 없으니, 궁여지책의 위장취업을 한 셈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녀의 태도는 상사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녀는 현장에서 사무직으로 발탁되었지만, 위장신분 노출이 두려워 할 수 없이 도망쳐야 했다.

"그때 자수하고 도움을 받았다면 아마 삼성 계열사 사장은 했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웃는다. 그녀는 사정을 알게된 상사의 도움으로 개인회사에 경리로 취업하고 독학으로 중, 고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1년에 마치고 방송통신대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후에 그녀는 결혼 후 두 딸의 엄마가 되며 다시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를 입학했다. 입학 모집 요강에 교육부가 공표했던 유치원 정교사자격을 박탈하자 그녀는 유아교육과 전국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난생처음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직장에서 스토커에게 빰을 맞고도 냉정했던 그녀가 국가를 향해 분노의 투쟁을 했고 기필코 그 뜻을 이뤘다.

"방송대학생을 힘없는 사람들로 얕보는 국가의 오만을 깨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녀가 정치인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생애 첫 집을 마련한 평촌 신도시에서 인체에 해로운 공해물질을 내 뿜는 화학공장을 만났다. 그녀는 다시 화학공장 이전 투쟁에 휘말렸고, 결국, 가해자, 피해자도 만족하는 결말을 이뤄내는 그녀를 지켜본 지역사회와 정치권은 그녀에게 뜨거운 러브콜을 보냈다.

"2002년, 몰락한 유학자 집안의 맏딸이 학벌도, 돈도, 인맥도 없이 안양시 최초 민선 여성의원으로 당선되어 경기도의원이 되었지요. 여성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숙명 같은 무게를 느끼며. 맏딸처럼 늘 초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듯 도로교통공단 첫 여성임원, 지방의료연합회 최초 여성사무총장, 안양시 청소년 재단 대표 등을 지냈습니다."

주변에서 '참 열심히 공정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 그녀에게 물었다.무엇을 위해 그리 열심히 하는가?

"꿈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고 싶어요. 꿈이 있어도 신분상으로 금전적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일어서서 함께 걸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런웨이'는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입니다. 모델은 함께 '런웨이'를 걸어야 빛이 납니다."

그녀는 어느 날, 모델이 된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세상의 모델로 살았다. 그리고 이제 하얀 머리칼이 우아해 보이는 60대에 비로소 '런웨이'를 걷고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모델의 삶을 각인시키고 있다.

모델의 정체성을 '아름답게 사는 법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2020년 '바비레따'라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그 곳에서 '아름답게 사는 법'을 전파하고자 했다. '바비레따'는 러시아어로 늦가을, 그림같이 아름다운 황금기를 뜻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바비레따'는 코로나라는 강추위를 만나 2년 만에 얼어붙었다.

"제 가슴에는 밥 먹고 공부만 해 보고 싶은 응어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퇴직 후 필리핀 국제대학원에 한 달간 어학연수를 했지요. 얼마나 행복하던지. 1개월의 영어 연수를 마치고 바로 11명을 이끌고 남아공 여행을 했어요. 대단한 모험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고 자랑스런 경험이었지요.”

아무도 초보인 줄 모르게 처음 하는 일을 능숙하게 해치우는 여자.

그녀가 모든 준비를 베테랑처럼 하는 걸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첫 무대에서도 7년쯤 된 모델처럼, 7년 후에도 방금 시작한 모델처럼 신선한 표정으로 '런웨이'를 걸을 수 있는 여자다.

'나는 모델이다!'라고 말한 지 1년 만에 '애플'의 cf를 찍게 된 그녀의 대사가 예사롭지 않다.

"이틀 동안 촬영했는데 대사나 연출지시 없이 상황만 던지는 거예요. 내 맘대로 했더니 그걸 카메라에 담는 거예요. 유명 배우가 된 것처럼 희열을 느꼈어요."

베테랑도 두러워 하는 "막가봐!" 연기를 신나게 하는 쎈 모델 정홍자는 벌써 베테랑처럼 보이지만 사실 첫 무대에서도 그녀는 베테랑다웠다.

"초짜가 좀 초짜다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물었더니 웃는다.

"너무나 익숙한데 어떻게 해야 초짜처럼 보일까요? NG도 안 나는데 일부러 다시 찍자 할 수도 없고"

백두산 정상 3번, 금강산 정상 3번, 한라산 정상 2번을 올랐다는 공식 데뷔 3년 차 모델 정홍자는 모두들 부러워하는 공익광고, 대기업 광고 등 촬영 현장에서나 크라이언트들에게 호평받는 모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사실은 자전거 타는 게 좀 서툴다"는 자백 때문에 대형 광고 최종후보에서 탈락하고서 속을 끓이고 있는 때때로 소심한 여자다.

"앞으로 무엇을 준비하는가?"라고 묻자 "드라마도 찍고, 영화도 찍을 거예요. 미주나 유럽에 진출해서 글로벌 회사들의 광고를 찍고 싶어요. 특히 패션을 주도하는 프랑스에 진출하고 싶어요 꼭"이라고 말하며 모델처럼 웃는다.

당장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페러디 화보 촬영을 준비한다면서 그녀는 곧 '프라다 광고를 찍게 될 거야!'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런웨이'에서 모델들이 왜 걷기만 하는 거지요? 그럴 거면 '워크웨이'라고 하던가?"

하긴 런웨이는 항공기 이륙장이니까 거기서 잘 걸으면 비행기처럼 뜰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참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사는 용감한 모델 정홍자는 잘 놀 줄 모르는 은퇴예정자들에게 '내 멋대로, 멋지게 사는 법'을 복음처럼 전하겠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그녀가 던진 말이 자꾸 귀에 걸린다.

'런웨이'에서 왜 모두들 걷기만 하냐고 ?

우린 어쩌면 어느 날, '런웨이에서 달려 나간 모델'이라는 눈스 헤드라인과 '모델 정홍자, 런웨이를 달려 비행기처럼 날아 오르다!'라는 빠리발 외신 보도를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에게 외쳐주자!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