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우의 인물채집] "춘천대첩ㅡ 3일의 기억" 그의 전쟁이 시작됐다!

시민일보 / siminilbo@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4-06-23 14: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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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큐멘타리 감독이며 배우다. 춘천에 살면서 춘천의 스토리를 찍었다.


"춘천대첩ㅡ 3일의 기억"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 이후 최고의 대첩이라고 눈 똥그랗게 뜨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모하듯 진지해서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장이레 감독, 아직 오십줄인 그는 이젠 70이 된 배우 독고영재 앞에서도 그의 아버지 독고성을 말하고 배우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과의 추억을 말했다.

그는 아역배우 출신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우였거든요. 데뷔년도로 따지면 제가 영화계 원로배우 수준일걸요."라며 웃는다.

2024년 6월, 그가 다큐멘타리를 내놨다.


전에도 연극ㆍ뮤지컬 홍보영상 감독도 했고 해외영화제 출품작인 단편영화 '잡부'도 찍었다.
다큐는 처음이다.

제작, 감독을 맡은 그는 농사 짓 듯 찍었다고 말했다. 


"좀 촌스럽게 찍은거 아닌가?"라는 첫 질문의 답인듯 싶다.

농사를 직접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니 그리 말 할 수 있다.


그런 농사처럼 명확한 답을 주는거라면 말 그대로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서 팥만 나온다면 영화 찍어서 성공 못 할 사람 누가 있을까?


참 철없는? 감독이다.

"6년 동안 수억 쓰면서 큰 농사를 지었습니다. 정말 고생했지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지켜보는 아내는 지루하고 힘들었을 겁니다"고 말하며 샐쭉한 표정의 아내를 곁눈질로 힐끗 본다.

"어느 날 '돈 좀 벌었다!'며 봉투를 내 놓는데 정말 울컥 했어요. 저작권료를 받았다는데... 정말 영혼을 갈아만든 작품의 댓가를 받아 온 거 잖아요. 감동이었지요"


봉투안엔 달랑 50만원이 있었단다.


대한민국 여자들이 월급 갖다 줄 때마다 이렇게 감동하면 이혼률은 99.9%감소 했을 것이다.

그는 배우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나이에 아역으로 데뷔했고, 10대 중반인 1987년 kbs한국 최초의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무대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역배우의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그 당시 심사위원인 송해, 이일웅, 김성원씨는 "더 이상의 평이 필요없을 정도"라고 평했다고 했다.

그런 그가 50이 넘은 나이에 연기도 아닌 다큐멘터리 제작 감독을 하게 된 연유가 궁금했다.


'춘천대첩'이라는 다큐는 후루룩 찍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고 더구나 절대로 돈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춘천사람들이 나라를 구하는 전투를 하고 모두 죽었다는 걸 알았을때, 정말 전율이 왔어요. 그냥 싸워서 이긴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소총을 내려놓고 수류탄 한 발과 화염병 하나를 품고 생전 처음 본 전차의 해치를 열고 들어간 군인과 지서에서 겨우 치안용 소총으로 무장한 아홉명의 경찰과 교복을 기워입은 학생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춘천을 지켰고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춘천전투의 기록이 미미했던 게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처럼 배 열두척도 없었고 거북선도 없었던 그 때 대첩이라 할 만한 3일의 전투로 한국전쟁은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된다.

김일성의 6.25 침략계획 핵심은 3일 안에 서울에서 항복문서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계획대로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 점령과 동시에 춘천을 돌파한 인민군이 수원을 장악한 순간 대한민국 정부의 퇴로를 차단한 김일성은 서울에서 힝복문서를 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춘천전투 3일 동안 춘천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그런 연유로 전쟁 발발 3일만에 중동부 전선 최고 지휘관을 경질했던 김일성은 "춘천3일이 모든 걸 망쳤다!"라고 한국전쟁 패인을 토로했다.

그 긴박한 3일 동안 그들은 서울을 장악됐고, 유엔은 한국전에 유엔군 파견 결정을 했다.


김일성이 그토록 원했던 수원비행장에는 맥아더가 날아와 미군의 지상군 투입을 확정 받았다.

"피아가 지옥 같았던 춘천의 그 3일이 없었다면 김일성의 계획대로 한국전쟁은 '7일 전쟁'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육군대장 출신인 군사학회 김정수 회장이 증언했다.

기적같은 유엔군 참전결정은 소련의 회의 불참으로 가능했고 미 지상군 신속투입은 맥아더의 수원 비행장 착륙으로 가능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을 현실로 만든 춘천전투 3일의 기억은 장이레 감독의 가슴을 펼떡이게 했고 밑없는 항아리 같은 제작사를 만들었고 빈독에 물을 부어가며 다큐가 만들어 졌다 .


드디어 2024년 6월4일 용산 cgv 2관에서 국방부의 장성들과 예비역 장성들, 그리고 육군 협회장과 시민 180명이 참석한 시사회를 마친 후 장이레 감독은 "수백개의 별들이 뜬 걸 보니 내가 한 짓이 별 볼 일이 된듯 해서 우쭐합니다"라며 웃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미친 짓이라 한 이유가 있긴 있다.

 
없는 살림에 돈 안되는 그 일에 그리도 열심인 이유를 힐난하고 74년이 지난 그 일을 기억하는 이도 이제 몇 안남았는데 무어그리 집착할 일인가 하고 주변 사람들이 묻자 장이레 감독은 화난듯 눈을 번뜩이며 삿대질까지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하는 거라고, 그 사람들이 그 3일동안 싸우다 전부 죽어서 아무도 기억 못하는데, 그걸 목격한 사람들도 다 죽어가니까 지금이라도 누군가 그걸 해야지 않겠나. 지금 우연히 우리가 이 땅에 숨 쉬고 잘 사는 줄 아는가? 그 분들처럼 죽지는
못 하더러도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는가? 살아남은 자들이..."

한국전쟁 74년이 지난 오늘, 그의 춘천대첩은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국방부에서 전군시사를 고려 중이라는 답을 들었고 교육부에서도 6.25 교육자료 인정에 긍정적 검토 중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겸허한 태도로 이 분들의 영혼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한국전쟁 참전국을 방문해서 고마움을 전하고 순회시사를 계속 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극영화 '춘천대첩'을 전국민 참여영화로 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또 울컥하는 장이레 감독의 증상은 그때, 그 '3일의 현장 속으로' 수시로 빠져드는 질병 탓이다. 전염성있는 이 질병은 아마도 코로나보다 더 빠르게 온 국민에게 전염될 듯 하다.

아역배우로 시작해서 독일 뮌헨대 아카데미 스쿨에서 연기공부를 했고 서울로 돌아와 뮤지컬 가스펠 감독을 시작으로 드라마틱한 프로젝트를 수 없이 했지만 88년 스턴트사고로 왼쪽 다리를 상하고 나서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왔던 그의 삶이 오직 '그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삶으로 바뀐 것이 참으로 '드라마틱'이라며 주일예배 동행을 청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다급히 인터뷰를 마치고 항께 손을 모았다.


'춘천, 그 3일의 기억'이 대한국인의 가슴 속에 각인돼 그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

 

오직 아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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